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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불평하지 않는 것. 자기가 하지 않을 거면 다른 누군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 그러니 웬만큼 큰 문제가 아니면 불편한 상태가 꽤 오래가는 편이었다.

; 나도 그런데...어쩌면 ...

p18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은 미묘한 무책임이기도 했다. 포기라고 할까. 무관심, 아니면 아주 옅은 자조. 책이든 교과서든 선생이든, 이미 있는 주장과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은 안일해 보였다.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말들과 처벌이나 상도 어떤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동시에 그러한 껍질이 필요한 이유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너그럽게, 한 발 물러서서.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니까. 다른 무엇이든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죽음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당장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 말은 보이지 않는 급훈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유한 거은 불안이었다.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은 지금 내 옆의 누군가에 대한 신뢰로 변했다. 아무리 학교의 시스템과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숫자들이 너희는 경쟁자이며 결코 동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도,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믿었다.

 눈앞에 살아 있는, 따스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인간을.

p31

 시간을 들일수록 의미가 생긴다.

.......

.......

 복잡해지고 무거워지는 게 좋다. 단순하고 가벼운 것들은 쉽게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p34

 길은 선이며 나는 선 위에 있고 닿지 않는 면들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혹은 싸우지도 않고 잃어버린 영토였다. 잃어버린,. 언제 가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 경험 없는 기억과 상실의 감각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p41

 나는 선택을 할 수 있기에 길을 찾는 것이 좋았다. 스스로 고를 수 있고 그 결과도 오로지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 좋았다. 먼지를 들이마시든 너무 오래 걷게 되든 보석 같은 풍경을 맞이하든, 다 나만이 감당하는 것이다.

 인생에 그럴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알량한 성적도 엄마 아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옷차림과 표정마저도 타인과 얽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교복의 길이와 머리카락의 색깔, 무심코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예상 못 한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길을 고르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은밀했다.

 모는 싫어하는 게 많았다.

 모는 목소리 큰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들과 틀린 맞춤법을 쓰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큰 목소리와 반말과 오탈자를 싫어한 게 아니라, 그러한 '사람'을 싫어했다.

......

......

 모를 알게 되면서 조금은 이해했다. 모는 어쨌거나 공정하고 싶어 했고, 공정하기 위해서 선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난하고 싫어할지언정 피해서는 피해서는 안 된다고.

; 모는 나랑 비슷....

p45

 "신을 믿는다는 말은 좀 이상해. 신뢰라는 건 상대가 정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발생하는 거야. 일종의 자기희생이자 도박이지. 그래서 숭고한 거고. 하지만 신은, 정직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도박을 걸 필요도 없어. 그러면 결국 의미가 희석되는 거지.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야."

" 그럼 그냥 있으면, 그냥 살면 되는 거네."

"그렇지 뭐.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고 환경오염  덜 시키고,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복잡하게 신까지 갈 것도 없이."

.......

저런 말은 별일 없이 사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 믿든 믿지 않든, 그 필요성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복권을 뽑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 회사에 탄원하지 않겠는가? 결과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겠는가.

 말하려면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p63

 길과 한 쌍이 되는 또 다른 단어, 인생. 인생이 하나의 길이라면 길 끝에는 죽음이 있고, 우리는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길은 짧은 편이고 어떤 이의 길은 지나치게 길다. 어떤 길은 평탄하고 어떤 길은 지독한 산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잃을 수도 있는 걸까? 인생이 길이라면, 우리는 이 길을 잃어버리고 영영 되찾지 않을 수도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발은 태엽장치에 고정된 뻐꾸기 인형처럼, 레일 위를 벗어날 수 없게 묶여 있는 것일까? 

 가끔은 일부러 먼 오솔길과 계단을 지나다닐 오빠를 떠올리며 우리의 공통점을 생각했다. 다른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오빠가 선택한 길들이 내게 깊을 안도감을, 위안을, 그리고 약간의 슬픔을 안겨 주었다는 것을 오빠는 알까.

 언니는......구글 어스에서, 자기가 갔어야 했을, 가졌어야 했을 길들을 검색하는 언니는.

 그때는 몰랐다. 언니의 길들. 언니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언니가 길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잃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도.

p83

 관계는 장소들로 이어진다. 지형적으로도 확장된다. 한 사람에게 속한 길까지 나에게 닿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정해져 있었다. 학교나 그 근처에서 집까지. 네이를 만난 뒤로, 출발지의 깃발은 매번 새로운 장소에 꽂혔다.

p88

 어렵게 얻은 것, 혹은 쉽게 얻어 낸 것. '알아보았다'는 것이 노고의 증명일 수 있을까? 알아보았으니 가질 자격을 얻은 걸까.

......

 때로는 어떤 단어 하나로 상황이 뚜렷해진다. 대중없이 굴러 다니던 것들이 조화롭게 자리 잡는 것이다. 지금은 그 말이 그랬다. '수집'.

......

.......

.......

 알아보는 것은 곧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그런 식으로 조합한 것은 내가 유일했으리라. 그렇게 길들을 알아보았기에, 의미를 찾아냈기에, 나는 길을 가진 것이었다. 모의 문장들도, 네이의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의 공통점을 알 것 같았다. 알아보고 모으려 한다는 것. 물건을, 문장을, 길을.

 왜 모으고, 기록하고, 알려 했을까? 무엇이 결핍되었기에 그런 것들로 채우려 했던가? 우리가 뭔가를 특별히 원할 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만족이란 뭘까?

 

 네이는 우리 둘보다는 좀 더 알고 있었던 같다. 세상을, 사람을, 그리고 모와 나를. 왜 네이는 우리에게 그런 애정을 주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책임질 수 잇을 만큼만 삐뚤어지고 회의적인, 남몰래 허황된 희망을 품고 있었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십 대들이었을 뿐인데.

p105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다. 모르는 동네에서 느끼는 새로움은 다른 삶의 방식과 모습이 가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p133

 비상사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변화에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수 있도록.

그러니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도록. 작은 일에 마음이 움직였다간,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 땐 감당하지 못하게 될테니까. 어디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말고 무엇에도 마음을 깊이 주지 말 것. 물건이든 사람이든, 어느 순간엔 모두 버리고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괜히 마음을 주었다간 다 버려야 할 때 너무 슬플 테니까.

 마음을 잘 다져 놓을 것. 딱딱하게, 정말로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깨져 버리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속마음 같은 건 아예 없는 게 낫다.

 언제나 각오하고 있을 것. 세상이 뒤집어지고 모든 틀이 흔들려 버릴 때가 곧 올 거니까.

 이런 마음이, 준비자세가 기본이라고. 나는 언제든 돌아설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다고.

 내가 무감각해 보인다면, 냉정해 보인다면, 무심해 보인다면.....열정이 없어 보인다면.

그건 그런 이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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