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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내가 겪은 러시아와, 다른 러시아인들이 경험한 러시아는 다른 나라일 수 있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말하는 한국과, 남해에 사는 사람이 묘사하는 한국이 다른 것과 같다. 불교 우화에 나오는 맹인모상과 마찬가지다. 내가 이야기하는 러시아는 눈을 감고 만진 코끼를 설명하는 꼴이라는 걸 '비정상회담'을 통해 절감했다.

p48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외부로 돌리는 게 혐오의 근원이다. 지금 중국인을 혐오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들과 접촉이 늘어나다 보니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시끄럽고 지저분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외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을 보면 중국인이겠거니 하고 시비를 건다.

 사실 러시아인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는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여권을 보여 주고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면 대부분 별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러시아에서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혐오는 온갖 형태로 살아남아 가지를 뻗는다.

; 우리나라로 별반 다르지 않다.

p55

 ...나는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왔다. 러시아는 '국적 국가'다. 러시아인을 하나로 묶는 건 국적밖에 없다. 민족이나 언어로는 도저히 공동체를 이룰 방법이 없다. 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이 사고방식이 그대로 머릿속에 박혀 있다. 나에게 국가란 곧 국적, 여권 색깔을 의미한다. 민족이나 언어는 내 여권의 색을 결정하지 못한다. 다른 나라로 귀화하면 배신자 소리를 듣지 않느냐는 질문도 들어 봤다. 한국인들은 국적을 바꾸는 걸 자신의 정신적인 뿌리까지 포함한 정체성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같은 다문화 다민족 국가 출신으로서는 사실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국적은 국적이고 나는 나다.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p80

...'이유 없는 웃음은 정신병자의 증상이다.'조금 과한 말 같지만 러시아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속담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웃음=진심'이다. 웃음은 항상 진실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웃어도 되지만 별 이유 없이 웃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본다. 웃음은 실용적인 감정 표현이다. 나의 감정을 있는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방법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한데도 웃으면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웃음이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라. 예를 들어 공항 출입국 관계자, 마트 판매원, 은행 직원처럼 일하는 내내 고객과 소통하는 이들은 웃음기를 쏙 빼고 상대를 대한다. 공항 출입국 관계자라면 매우 무뚝뚝한 태도로 외국인을 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내가 왜 외국인을 보고 웃어야 돼?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내 친구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인데,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의 일부를 줘야 해?" 냉정하다 못해 무정하게 들릴 지경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웃음이 내 마음의 일부'라는 점이다. 마음은 나의 소유이고, 이를 업무에 투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는 러시아에서 일을 한 적이 없어서 주변 지인들을 통해 다시 확인했는데, 러시아인들이 일할 때와 개인 시간일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p110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이행은 불시착하는 비행기 같았다. 1990년대는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러시아 사회의 혼란, 무질서, 높은 범죄율, 극도로 부족한 식료품, 급여 체불, 연이어 터지는 파업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돌이켜 보면, 그때가 새로 태어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무능한 정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 일반 시민들, 체첸 전쟁으로 터진 민족 갈등. 결코 살기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한때 미국과 겨루던 강대국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제 규모는 4분의 1, 국민 소득은 3분의 1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산업과 생산은 거의 박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소련이 사람들의 피를 대가로 70년 동안 쌓아온 것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어디를 봐도 문제투성이였다. 어느 누구도 무엇부터 챙겨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면 현재의 러시아는 어떨까? 지금은 유럽 국가와 별 차이가 없는 자본주의 국가다. 경제 지표만 보면 동유럽이나 주요 아시아 국가, 남미 국가와 비슷하거나 우월한 수준이다. 대도시 밖에 잇는 지방 주민의 생활 수준은 부유한 유럽 국가보다 떨어지지만, 수도인 모스크바나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민들은 런던과 파리, 벨를린 주민과 비슷한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 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파리보다 모스크바가 훨씬 깨끗하며, 잘 꾸며져 있고, 인프라가 배로 잘된 도시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의 상징이었던 계획 겨엦는 이제 역사 속 기록에만 남아 있다. 무료 교육, 무료 의료 서비스 등과 같은 사회주의의 주요 정책도 사라진 지 오래다. 러시아 국민들도 한국과 똑같이 자본주의적인 혜택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다. 사유 재산이 존재하고, 부동산을 사고팔 수 있다. 개인 사업도 당연히 가능하다. 해외여행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회주의의 기억은 기성세대의 머릿속에만 남은 역사의 흔적일 뿐이다.

p123

....소련의 흔적이 희미해질 무렵, 새로운 러시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들이 겹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생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불법 또는 탈법적인 방법으로 국가 재산을 사유화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부를 갖게 된 옐친 대통령 측근들,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효과가 사라진 개혁들. 정치 세력들의 투쟁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하락한 사회 구조. 말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실제로는 비리를 저지르고 국가 예산을 횡령하기 바쁜 정치인들.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민주주의'와 '비리와 부패'는 동의어였다.

p131

 러시아 기성세대가 소련 시절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변화의 가장 큰 희생자였기 때문이었단다. 1990년대 초반에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을 때, 당시 30~40 대들은 성숙한 사회인이자,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올라 있던 세대였다. 하지만 체제 변화로 이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됐다. 이 세대는 어는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이들은 40~50대가 됐고, 10~20대와 동일 선상에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회사 입장에서는 50대 초반보다는 20대 초반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으니, 인구의 절반이 넘는 세대는 쓸모없는 존재가 돼 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옛날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건 당연했다.

 부모님께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 두 체제 안에서 살아보니 사회주의의 장점을 확실히 알게 되셨다고 한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교육, 일자리, 부동산 등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국가는 초.중.고 교육을 보장했고, 대학에는 무조건 무상으로 다닐 수 있었다. 모든 대학 졸업자에게 일자리를 100퍼센트 보장했기 때문에 대학 시절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집도 국가가 무료로 나눠 주고, 차도 국가에서 분양받는 식이었으니 굳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늙으면 국가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연금을 주니 노후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빠 말로는 대학 때 당신의 걱정거리가 딱 두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 둘째, 시험공부를 하면서 연애하는 것. 이 둘 중에 두 번째 걱정거리가 더 컸다고 농담까지 하셨다. 아빠 말씀을 들어 보니 이해가 갔다. 어차피 일자리는 국가에서 정해 주고, 살 집 역시 국가가 무료로 준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오늘 저녁 메뉴와 이번 주말 데이트 코스 정하기가 되는 게 맞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 자본주의의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이 무러까. 아빠는 "부족한 게 없다"고 답하셨다. 돈만 있으면 마트에 가서 계절에 상관없이 모든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잇다는 것, 돈만 있으면 가전제품을 국가가 나눠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오늘 살 수 있다는 것, 돈만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국내 여행, 심지어 해외여행도 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자유'라는 말을 쓰지는 않으셨지만 아빠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유였다.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아빠가 '자유'라는 단어를 안 쓴 이유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 사람에게는 '자유'라는 개념과 '무질서'라는 개념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등장한 새로운 정권은 워낙 자유라는 말을 남용해서 이제 러시아 국민에게 자유는 무질서와 불평등, 비리와 횡령, 권력 남용과 다름없는 말이다.

p155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만큼 자유롭고 제한이 없는 나라도 없다. 이렇게 정치가 우리 생활 하나하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는, 혹은 외면하는 사람들은 반민주적인 정부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갉아먹고 희생시키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려는 순간 불거진다. 2019년까지 러시아는 겉으로는 정말 자유로운 나라처럼 보였다....정치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푸틴의 정적이 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푸틴 반대파가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정부 인사의 비리나 횡령을 고발해도 언론사들은 침묵한다. 언론은 양비론을 펼치거나 오히려 반대파를 비난하고, 푸틴에 대한 비판을 삼가하는 등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또, 정부는 정적의 계좌를 동결하거나 부패 혐의를 뒤집어 씌워 '합법적'으로 탄압한다.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순간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p161

 러시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리가르히는 약삭빠른 사람들이다. 소련이 붕괴할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이 시류를 타고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고 본다. 이 과정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련 말기에 사회주의 계획 경제 시스템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책임져 왔던 국가는 손을 놓고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당장 생존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크렘린 궁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소련 해체가 결정됐을 때 반발하는 움직임이 크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다. 문제는 해체 방식이었다. .....

p170

 올리가르히를 보면 러시아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느낀다. 올리가르히로 인해 러시아는 제대로 된 중소기업을 키우지 못했다. 2000년대 고유가 시대에 번 돈을 재투자하지 못했다. 조금 성해서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올리가르히 소유의 대기업이 삼켜 버린다. 그래서 러시아는 일자리가 부족하고 기업가 정신이 약화되었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이들에게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천장이 존재한다. 계급을 없애겠다며 등장한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새로운 계급과 피라미드가 등장했다. 1990년대의 체제가 지금도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p195

 러시아의 입장은 이렇다. "우리는 미국과 적대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 건드리면 가만있을 수 없다." 서구에서는 러시아가 깡패처럼 행동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사기를 친 건 미국인데 왜 나한테만 그래? "이다. 이 차이를 알아야 러시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역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러시아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오로지 미국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먼저 나서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한다.....본질적으로 남북통일 문제는 남한과 북한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둘이 해결할 일에 미국, 중국, 일본이 끼니 러시아도 들어가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만한 힘이 없어서다. 돌아가는 판이 러시아의 마음에 안 들어도 '깊은 우려와 대화 촉구'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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