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펼쳐 든 책이었는데, 저자가 참 낯이 익었다. 알쓸범잡에 나온 정재민 전 판사이자 현 법무심의관이 책의 저자이다. 알쓸범잡에서 정말 재밌게 들었던 판사 시절 에피소드들이 책에 수록되어 있길래 바로 책을 구매했다.
제일 재밌는 에피소드는 역시 방송에서도 소개했던 희귀병에 걸린 피고인이다.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전국에 딱 한 명 있는데, 의사가 지금 고향에 있는 시골 병원에 있어서 거기서 치료를 받느라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면서 몇 년 넘게 재판을 연기했다고 한다. 이 피고인의 전과가 사기인 점을 고려하여 재판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고 드디어 재판이 열렸다. 재판 당일 이 피고인은 침대에 누워 양옆에 간호사 둘과 형을 대동하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나타났다. 재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판사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도 가짜였고, 형도 가짜였고, 병도 가짜였다. 종국에는 침대에서 머쓱하게 일어나서는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가끔 판사 욕을 한다. 이실직고하자면 꽤 자주 한다. 10살짜리 손녀를 수년간 성폭행한 할아버지가 왜 징역 17년밖에 안되는지, 흉악범죄자가 왜 징역 15년밖에 안 받았으며 지금은 무슨 자격으로 국민 세금으로 잘 살고 있는지 등 우리나라 형벌이 너무 약하다며 오늘도 욕을 했다.
저 할아버지는 검사 측에서 20년을 구형했으나 초범인 점, 피고가 반성을 하고 있고 다시는 손녀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한 점 등을 참작하여 17년이 선고됐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보면 나 포함 많은 국민들이 공분에 휩싸인다. 사형 때려야지 참작은 뭔 참작?!하면서 분개한다. 이에 대한 전직 판사인 저자의 설명은 이러하다.
우선 검사가 보는 피의자와 법정에서 판사가 만나는 피의자가 다르다. 검사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범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법정에서는 모든 죄를 반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법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리할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는 것도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데 한몫한다고 한다.
또 판결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이라고 한다. 검사가 대변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변호인이 대변하는 개인의 자유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법이라는 울타리를 쳐두고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지를 판사가 판단하는 것이다.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핵심은 '형평'이다. 법 울타리를 넘어선 자를 칼로 처단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형평을 따져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법질서 사이,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사이,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칼이 아니라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응징보다는 형평을 위해서 말이다.
판사는 늘 판결로써 말한다. 때문에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무슨 마음가짐이었고, 양형을 결정할 때는 어떠한 중압감에 시달리는지 책을 통해서 처음 듣게 되었다. 이해는 되지만 안타깝게도 판사 욕은 계속할 것 같다. 저자가 강조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직까지 와닿지도 않을뿐더러, 저자가 지양하는 과잉 도덕주의적 사고를 버리기에는 아직 사회 물이 덜 든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엄벌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