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울의 한 산동네. 아홉 살인 '나' 백여민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이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제일 높이 산꼭대기에 위치한 끝집이긴 하지만 '우리 집'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기쁘기만 하다. 여민은 이 산동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난과 차별, 부조리, 설움 그리고 풋풋한 첫사랑을 겪으며 인생을 배워간다.
아홉살 인생. 대한민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소설이다. 2003년 MBC '느낌표' 프로그램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로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아직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이름을 올리는 책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무려 93쇄 판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알만 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아홉 살 때였다. 아홉 살에 읽는 아홉살 인생. 동갑내기 주인공이라고 만만하게 덤볐다가 큰코다쳤다. 아홉 살의 나는 이 책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가난은 무거웠고 어른들의 속 사정은 무서웠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는 가난한 산동네 이야기였다는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스물아홉 살에 다시 읽은 아홉살 인생에는 어렸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첫째, 6~70년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산업재해, 노동 문제들이 보였다. 여민의 아버지가 밀린 월급을 받으러 부산에 내려간 사이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무허가 잉크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그만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 화학 약품의 위험성이 노동자에게 제대로 고지가 되지 않았다는 점, 노동자를 보호해 줄 최소한의 장비조차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명백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관련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경공업의 발달로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성과 아동이 많았다. 부모님 없이 누나와 단둘이 사는 동네 친구 신기종은 누나가 공장에 일을 하러 갈 때면 집에 홀로 방치되기 일쑤였고, 골목대장 검은제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열두 살 이란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공장에 들어간다. 그렇게 많은 10대 소년소녀들이 학업도 포기하고 청춘도 포기한 채 산업화라는 시대의 바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둘째, 가난과 가정폭력의 대물림 속에 누구나 검은제비가 될 수 있다. 골목대장 검은제비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쫓겨난 뒤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술에 취해 살림살이를 깨부수고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검은제비는 빨리 어른이 되어 꼭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분노에 섞인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덜컥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른 나이에 어른의 길로 들어선다.
생각해본다. 그렇게 검은제비가 아버지 나이가 될 때쯤, 아버지처럼 직장에서 쫓겨날 때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몹쓸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은 모든 건 무능한 자신 탓이라고 여기던, 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제 피붙이와 제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대던, 그런 아버지가 어느새 자신이 되어있음을 알아차리지는 않았을까.
검은제비의 굴레, 가난과 가정폭력의 대물림. 사실 검은제비는 검은제비의 아버지일 수도, 검은제비일 수도, 검은제비의 아들일 수도, 아니면 죽도록 증오하는 아버지를 둔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일 수도 있다.
셋째, 청년 문제의 상징 골방철학자. 힘들게 대학을 졸업한 후 시험공부를 몇 년째 한다는 골방철학자. 꿈은 창대하지만 현실은 비루하기만 하다.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늙은 어머니의 기대가 버겁고, 일도 안 하고 집에서 시간만 축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 손가락질하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 좋아하는 여성에게 직접 편지를 건넬 용기조차 없던 골방철학자는 끝내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자살을 선택한다.
이런 골방철학자의 모습은 현재로 이어진다. 청년 실업, 청년 빈곤. 그 속에 연애와 결혼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매년 급증하는 청년 고독사는 노년층과 달리 극단적 선택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이 머물렀던 원룸이나 고시원에는 공무원 수험서, 이력서들이 함께 발견된다. 지금도 취업의 문턱 앞에 골방에 고립된 청년들이 이틀에 한 명꼴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골방철학자를 보며 현실에 맞춰 욕망을 바꾸거나,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현실을 바꾸지 못해 현실에 맞춰 욕망을 낮추고 있는 청년들이 대다수이다. 어디까지 낮춰야 끝이 나는 것일까. 욕망의 내리막길 속에 가난과 사회적 고립, 외로움에 홀로 죽어가는 청춘들이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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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스물아홉.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모든 아홉이 그러하듯 이룩한 것 하나 없이 아홉을 보내고 강제로 새 출발선에 서 있는 지금, 기분이 몹시 헛헛하고 막막하다. 이 책을 썼던 스물아홉 살의 작가는 모든 아홉살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네 인생에서 어떤 출발점과 도달점에 연연해하는 것부터가 고정관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도달점에 닿는 순간, 그건 곧 출발점이 되고 마니까. 그래서 우리네 인생은 중단 없이 쭈욱 진행되는 과정일 뿐인 것이다.'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단절이 없다. 그저 앞으로 곧게 진행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희로애락 중 하나만 과장해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지 말자. 흘러가는 인생 속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니.
아홉 살에 울타리를 치지 말자. 인생은 아홉 살에서 끝난 게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