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거대한 욕망의 세계
꿈인 듯 현실인 듯, 거부할 수 없는 환상의 문이 열린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사실 굉장히 어려웠다. 글 자체가 어려웠다기보다는 여기에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주인공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절정으로 치닫는 찰나에 나타나는 환상 같은 장면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렇지만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해설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 보며 읽어보자. 이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는 큰 깨달음과 함께 내 해석도 일리가 있구나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책에는 기억과 맞바꾼 물고기 비늘이 화폐인 [국경시장], 쿠문이라고 불리는 천재병에 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과 이전의 평범한 삶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쿠문], 극도로 수동적인 인생을 살다 곰 모양 유리병으로 변해버린 남자 [관념 잼],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암컷 킹코브라 이야기 [동족], 그리고 곡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필멸]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이 단편들을 모두 한 데 엮는 키워드는 바로 '욕망'이다. 인생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인물들의 욕망은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무절제한 소비의 쾌락으로,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질투 속에서 살게 한 천재성에 대한 갈망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살해를 할 만큼의 예술에 대한 집착과 열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자리를 찾고 싶은 마음을 사물에 그대로 투영하여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강박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되자 인간과 소통하고 인간과 같은 육체가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욕망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욕망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은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왔을까.
그것은 욕망 중독 때문이 아닐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욕망에 중독되어 머릿속이 온통 그것으로 가득 차버린 채로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좇기에 급급한, 그것을 제외하면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도 충분히 욕망에 빠질 수 있다.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삶이 무가치해지는 순간 우리도 똑같이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내 삶이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욕망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순 있어도, 욕망 자체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몇 편만 간단히 소개하겠다.
국경시장 : P국에 위치한 한국 영사관 직원 조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밀입국자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는다. 반미치광이 상태로 발견된 이 밀입국자는 있지도 않는 국경시장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온전치 못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국경시장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서는 야시장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현실 세계의 돈이 사용되지 않는다. 화폐는 오로지 사람의 기억과 맞바꾼 물고기 비늘. 존재조차 모르던 기억, 쓸모없다고 생각한 기억, 너무 끔찍해 지우고 싶던 기억들을 대가로 교환을 하고는 순식간에 흥청망청 써버리고 마는데. 사람들은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물고기 비늘을 갈구하며 교환소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쿠문 : '나'는 수학과 교수다. 그리고 동생의 천재성을 질투한다.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요양원 생활을 하는 동생의 논문을 훔쳐 내 것인 양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날 신입생 '류'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하고는 갈 곳 없는 류를 거둔다. 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기 재능에 집중하기를 바랐건만, 류는 오히려 방에 틀어박혀서는 은둔 생활을 한다. 자신의 천재성에 무관심한 류에 안달 난 나는 외출한 류를 미행을 하는데. 류가 요즘 유행한다는 천재병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