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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진리

[도서] 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저/황을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IVP,1958, 1971, 2008)

예수님의 출생은 자연적이었지만, 잉태는 초자연적이었다. 
그의 죽음은 자연적이었지만, 부활은 초자연적이었다. 

* 부활의 증거
1. 시체가 없다 
이상한 주장이 있긴 하다.
1) 여인이 엉뚱한 무덤을 찾아갔다는 주장: 동틀 무렵(해 돋을 무렵)에 찾아간 여인이 캄캄한 밤도 아니고 실수 했을리 없다. 
2) 예수님이 기절했다는 주장: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빌라도의 부하가 죽음을 확인했다.
3) 도둑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설명: 로마군인은 무덤을 철저히 지켰다.
4)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는 주장: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무덤을 굳게 지킬 것을 사전에 요청했고, 그렇게 시행되엇다.
5) 로마 혹은 유대 당국자들이 시체를 치웠다는 설명: 그리스도가 부활을 유대인이 믿는 것을 두려워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시체를 치웠다면, 부활을 증거하는 그들에게 증거를 대면 될 뿐인 일을 폭력을 사용한 일 밖엔 없다. 
2. 수의가 헝클어지지 않았다. 
3.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 : 막달라 마리아에게, 무덤에서 돌아가는 여인들에게,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다락방에 모인 열 사람에게,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에게, 갈릴리의 산에서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에게,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등 여러 제자들에게, 승천시 베다니에서 가까운 감람산 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4. 제자들이 변화되었다. 
1) 베드로 : 3번 부인한 유대인을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 후, 수많은 군중을 향해 담대하고 능력있게 설교하고,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인 공회를 논박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는가 하면, 후에는 사형이 예상되는데도 그 전날 밤 감옥에서 편하게 잠을 자는 경지까지 이른다. 완전 새로운 사람이 된다. 
2) 야고보: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의심많은 그가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확실한 신자가 되어 있다. 

 

* 죄의 심각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 :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병을 정확하게 진단한 후에야 비로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죄성
@ 법이 생긴 것은 대부분 인간 사이의 분쟁을 이기심없이 공평하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 법과 질서로는 부족하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 필요하다.
-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약서가 필요하다. 
- 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물쇠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자니 죄는 불법이라는 측면에서의 적극적인 죄도 있지만,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하는 측면에서의 소극적인 죄도 죄이므로 죄 아래 있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행위 뒤에 있는 생각에 있다. 
- 나름대로 이상을 실천해 가는 사람이라도 실수가 있고, 성격적 결함이 있고 더더구나 사소한 실수나 성격적 결함을 특별히 걱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십계명을 통한 죄의 반추
-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곳에 자신을 두는 것이 죄이다. 생각과 말, 행동에서, 일할 때와 쉴 때, 친구 관계와 직업에서, 우리의 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할 때, 직장에서와 집에서 항상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나사렛 예수 외에 이 계명을 지킨 사람은 없다.
- 항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가? 진정으로 기도하는가?
- 부주의한 말 때문에 주님의 거룩하심이 모독을 받진 않았는가?
- 하나님을 위해 따로 마련된 거룩한 날,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
- 부모님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가?
- 분노, 감정통제 상실, 증오, 악의에 찬 험담으로 살인하진 않았는가?
- 남편에게 이기적인 요구는 하지 않는가?
- 사업에서 시종일관 양심적이었는가? 바르게 벌이는 해야 함과 더불어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일하고 있는가?
- 중상, 비방, 실없는 말과 수다, 거짓말과 진실의 교묘한 과장이나 왜곡, 그릇된 인상을 줌으로써, 사실이 아닌 말을 정정하지 않음으로써, 말과 침묵으로써 거짓 증거를 하진 않았는가?
- 항상 자족하는 마음인가?

* 죄의 결과
@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죄의 결과 중 가장 무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 다른 사람과의 갈등: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항한 자아의 표현이다. 자기 중심성은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데, 우월감, 열등감, 무시, 자기 연민, 자기 사랑, 자기 의지로 충만하기도 한다. 가정불화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여러 문제, 노사 갈등과 같은 사회 문제로 인한 오늘날의 긴장은 두려움과 어리석음, 즉 죄의 결과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한과 남의 악함을 과장한다. 
- "교육은 나의 관심의 시야를 넓혀 줌으로써 나의 자아 중심성을 보다 덜 비극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여기까지는 탑을 오르는 것 같아서 오를수록 물리적 시야는 넓어지지만, 여전히 나는 그 중심이요 판단의 기준으로 남아있다 (템플 대주교)-
@ 그리스도가 필요함
- 자아에서 비자아로의 변화,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로만 가능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은 헛되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하나님의 뜻"대로, 온갖 치욕과 멸시를 당하시는 죽음이었다. 복수도, 저항도, 외침도, 의기투합도, 그의 능력을 행하함도 아니었다. 억울한 고난과 죽음을 인내로 참아내는 것이었다. 그 본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죄의 근본인 "자기 중심성" 인간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고 3년을 함께 했던 제자들도 여전히 교만하고 우레와 같은 기질이 남아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겸손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로마서 8:9)"
육체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만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저항과 단호한 거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의지하고 복종하여 우리 삶을 온전히 지배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육체를 부인하고 성령에 굴복하는 습관을 가질수록 육체의 추한 일은 점점 사라지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꾸준히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회개, 믿음, 훈련)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높으므로 하나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에게 '주의 말씀'이 임하셨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며,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은, 그는 가르치는 것은 열렬히 믿었느나 광신도가 아니었다. 인기가 없는 내용도 가르치셨으나 괴상한 내용은 아니다. 피로도 느끼는 사람이지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는 비이기적이다. 자신의 신성을 믿지만 교만하거나 자신의 위엄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이 자기 중심성에 있으나, 그의 행동은 자기중심성과 거리가 멀었다. 만인의 주인이나 만인의 종이 되었다. 자기 존중과 자기 희생의 양자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자기를 극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다. 
모든 죄는 타락하고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 있다. 무시와 시기, 우월감이나 열등감 
인간은 자기중심적이 존재이다. 인간은 이기심없이 공평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없기에 법이 생겼다. 약속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계약서가 필요하다. 법과 질서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법을 집행할 경찰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그 어떠한 것도 인간의 죄로 인한 '악함'을 낫게 할 수 없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교육과 사회 개혁을 통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다.
삶의 모든 관계-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피고용자 등-는 복잡하다. 사람들이 겸손해 상대방보다 자신을 책망했다면 수많은 이혼이 예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부상담을..
상대방의 관점을 옳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모든 오해와 갈등이 시작된다. 듣기보다는 말하기, 순순히 따르기보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순순히 따르기를 가르치고 노력하면 될까? 인간 스스로는 이것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구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르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어려운 대목이다.
두려움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며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으로 복음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들은 과연 부질없는, 다른 복음인가?
그러나, 과연 끊임없는 교육과 사회개혁에 동참하는 것은 필요없는 일인가? 이 노력으로 인해 '인간의 죄성' 본질에 귀기울이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제자 중 좀 더 밀접한 교제를 가진 베드로, 그의 삶을 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죽음의 필요성을 거부한 최초의 사람이며,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경을 풀어주실 때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자신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지만, 그 곳까지 찾아오신 그리스도께 그제야 붙들림 바 된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예견하고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어도 안 되며, 이기적 야망을 가져도 안 되고, 세상 기준을 따라도 안 되며, 현재 생활의 슬픔을 지나치게 중시해서도 안된다.  성경을 자신의 지침으로 여기는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과 '세상 안'에서 동시에 똑같이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코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제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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