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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토마토파이

[도서]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저/이세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책을 읽기 전에 주인공의 나이를 살핍니다. 인물과 만나기 전 마음가짐을 다지는 시간이랄까요. 어린 주인공이 나오면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지나가면 괜찮아.'하고 추억에 빠지거나 응원하게 되고, 동년배를 만나면 같은 나이라는 것만으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40대 후반을 지나고 있는 등장인물들을 모아서 동창회를 열고 싶어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에벌린이 말한 것처럼 '늙었다고 하기엔 너무 젊고, 젊다고 하기엔 너무 늙은' 친구들을 한데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면 재밌을 듯.. ㅋ

반면, 나이 많은 노년의 주인공은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그들은 대부분 아프거나,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거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엄청난 말폭탄을 던지기 때문이죠. 70대 이상은 다 울 엄마 아빠 같아요. 그래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현재 지나고 있고, 나도 언젠가 지나야 할 노년의 이야기. 거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잔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기 전까지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 사는 잔 할머니는 올해 90살입니다. 남편은 몇년 전에 죽었고 아들 딸은 파리에 살아서, 지금은 넓은 시골집에 혼자 살아요. 취미는 십자말 풀이, 텃밭 가꾸기, 친구들과 브리지 게임하기, (손주들 주려고) 케이크 구워서 냉동하기. 이 책은 잔 할머니가 아흔 살이 되는 해 3월 20일부터 다음해 3월 19일까지 1년에 걸쳐 쓴 일기예요. 회고록이라면 별로 안 궁금한데, 일기라고 하니 호기심이 동합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니까요. 아흔 살의 하루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게 행복하고, 무엇이 두려울까? 부모님의 일기장을 엿보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어요.

나는 조금 이른 시각에, 한 정오쯤에 점심을 먹기 좋아한다. 애들이 집에 오면 오후 2시에야 겨우 식탁에 앉기도 한다! 그러면 나의 생활 습관은 다 어그러진다. 시간의 흐름이 여느 날 같지 않고, 산책을 나가면 벌써 태양의 위치가 다른다. 애들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면 별걸 다 트집을 잡는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사람이 변했다, 소리나 듣는다. 나는 트집쟁이가 된 게 아니라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27)

나는 염색을 그만둔 지 벌써 한참 됐다. 딸이 갑자기 열 살은 더 들어 보인다고 무진장 잔소리를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34)

지금은 애가 몇 살이든 간에 어디서나 어른들과 동석을 한다. 그러니 아이는 지루해서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떼를 쓰든가, 긴 의자나 루이 16세풍 안락의자에 맥없이 널브러져 있다. 식전주를 마시는 자리에도 아이들을 동석시키고 오렌지주스나 코카콜라를 나눠준다. 나중에 보면 양탄자는 음식 부스러기 천지, 다탁은 아이들 컵 놓은 자리가 끈적끈적, 안락의자는 아이들이 뭐 묻은 손가락을 닦아서 얼룩투성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내가 한소리 들을 거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고 나중에 또 우리 집에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가 죽고 나면 골동품 안락의자, 긴 의자, 양탄자, 다탁도 다 걔들 거다. 어차피 자기들 물건인데 곱게 쓰지 않으면 자기들만 손해지!(42)

나는 이제 예측되지 않는 일이 싫다. 예상 밖의 일이 생기면 당장 나 불편할 걱정부터 앞선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하나, 하루 일정이 어떻게 꼬이는 건가, 미뤄질 수밖에 없는 십자말풀이...... 솔직히 내 새끼들이 내일 당장 내려오겠다고 할 때도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기네 먹을 음식은 자기네가 다 싸온다고 해도 소용없다. 결국은 늘 뭐가 없다고 난리다.(103)

시골생활에도 루틴이 있고, 그것이 깨지면 짜증이 난다는 것. 손주들이 예쁘지만 모든 행동이 마냥 귀엽지만은 않다는 것. 잔 할머니의 일기를 읽는데 담양에 계신 아버지가 계속 생각났어요. 손주들이 한바탕 어지르고 간 집을 치우면서 툴툴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거든요. 식사시간이 늦어지는 걸 싫어하는 것도, 정원의 화초와 텃밭의 농작물을 자식처럼 아끼는 것도, 작은 물건 하나에 문득문득 옛 추억에 빠져드는 것도 닮았어요. 무엇보다 마음이 찡했던 건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는 거였어요.

희한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다.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렇다. 사별도 많이 겪어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추억에 눈물이 나고 가슴속에는 고독이 점점 더 두텁게 한 겹 한 겹 깔린다. 고독이 우리를 에워싸고 세상과 괴리시킨다. 우리는 마치 두 갈래 강 사이에 사는 것 같다. 산 자들의 강이 한 갈래, 죽은 자들의 강이 또 한 갈래. 어쩌면 떠나간 사람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152)

이제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어쩌면 나 아닐까? 제일 골골대던 사람이 제일 먼저 가라는 법은 없더라. 남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아침 내가 침대에 틀어박혀 골몰했던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머리와 발치에 구리 창살이 있는 이 침대는 분명히 나의 임종 침상이 되리라.(154)

지인들의 부고를 계속 들어서일까, 며칠 전부터 침대머리 탁자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어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이나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을 적는다.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든가, 어디서 주워들은 좋은 말이라든가,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도 적는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365)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식들이 한 번씩 왔다가 갈 때마다 내가 저 아이들을 또 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나는 미래와 현재가 뒤죽박죽이다. 이 나이에는 미래를 생각한다고 해서 현재가 더 견딜 만해지지 않는다.(376)

내가 노년의 이야기를 꺼렸던 이유가 결국 '죽음'과 마주해야하기 때문이었어요. 지인들의 부고를 듣고, 몸이 날로 쇠약해지는 걸 느끼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마음이 어떨까? 잔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식을 기획하고, 누구에게 무엇을 남겨줄까를 궁리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피하기보다 차분히 맞이하려 하죠. 90세까지 장수한 분의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삶의 과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숙연했어요.

나는 왜 이 기나긴 생의 끝자락에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을 글로 적어두는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는 욕구 때문인가? 일기는 할머니가 아니라 아가씨가 쓰는 거다. 나는 이제 일기장에 털어놓고 싶은 비밀 이야기가 없다... 정말로 일기를 썼어야 했던 나이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잔 할머니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이라고 했지만, 제 눈엔 다 특별해보였어요. 집안에 들어온 말벌을 쫒아내는 것도, 밤길을 운전하다 낯선 도로를 헤매는 것도, 노루가 화단을 망쳐버린 것도, 치매에 걸린 이웃 이야기도.. 특히 60년동안 한번도 실패한 적 없는 나무딸기잼을 망치고서 절망에 빠지는 모습은 (할머니에겐 죄송하지만) 넘 귀여웠어요.ㅎㅎ <체리토마토 파이>라는 책 제목도 요리부심 강한 할머니가 망신당하는 에피소드에서 나왔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일기를 꾸준히 써야겠다는 결심을 다졌어요. 작은 다이어리에 그날의 단상을 짧게 남기고 있는데, 쓰기 싫을 때마다 잔 할머니의 일기장을 펼쳐보렵니다. 일기 뽐뿌 책으로는 최고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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