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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도서]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태연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국적인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은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어르신이다. 26년간 공사판에서 포클레인을 몰아온 굴착기 운전사 허남훈 씨는 68세를 맞으면서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기로 한다. 은퇴를 선언해도 충분할 나이지만, 코로나 시국에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1년 간의 말미를 둔 것이다. 그렇다면 일흔을 앞둔 남자가 휴식을 선언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코로나 방역조치로 해외여행은 금지되고, 취미생활을 갖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던 남훈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청년 일지'를 꺼내든다. 알코올중독으로 죽다 살아난 40대 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다짐해놓은 노트이다. 노트에는 몇 개의 버킷리스트가 적혀있었다.
오늘부터 내 삶의 목표는 늙어서 죽는 것이며, 멋지게 늙는 것이다. (27)

첫 번째 미션은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이다. 낡은 속옷은 몽땅 버리고 깔끔한 새것으로 구입할 것. 그리고 백화점에서 명품 정장을 살 것. 남훈씨는 작업용 점퍼에 흙 묻은 작업용 운동화를 신고 호기롭게 백화점으로 향한다. 명품 매장을 기웃거리다가 매장 직원에게 "할아버지, 그거 비싸요."라는 면박만 받고 돌아선다. 다행히 길거리 신사복 매장에서 친절한 재단사를 만나서 양복 한 벌을 맞추는 데 성공한다.

두 번째 미션은 외국어 배우기이다. 흔한 영어보다는 좀더 색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어 도서관에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영화 DVD를 빌려온다. 영화를 보면서 언어의 느낌을 하나씩 맛본 뒤 최종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하고 학원에 등록한다. 남훈 씨의 포크레인 같은 추진력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한다. 소설이니까 그렇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이 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68세 굴착기 운전사 허남훈 씨가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하고, 20대 젊은이들과 기초 스페인어를 배우는 장면을 읽으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드라마틱하게 실력이 늘지는 않겠지만, 띄엄띄엄 내 소개를 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새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56)
실제로 남훈 씨에게 스페인어는 다른 세상의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된다. 양복 치수를 재던 재단사가 '춤이라도 추실 수 있게, 편안하게 만들어드리겠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플라멩코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그 나이에 플라멩코를 배워서 스페인에 가서 광장의 무희와 춤을 추겠다는 꿈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니나다를까. 남훈 씨가 춤연습을 과하게 한 날 무릎에 물이 차서 병원 신세를 진다. 2~3개월 쉬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을 때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남훈 씨는 쉬는 동안 유튜브를 통해 팔 동작을 연습하고, 무릎 상태가 호전되자 춤연습을 재개한다. 무대뽀 정신으로 도전하는 남훈 씨도 대단하고, 그의 도전을 응원하는 주변인들도 따뜻한 사람들이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삶이 소설과 꼭 다르게 흘러가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코로나 시국의 에피소드가 여럿 나오는데, 요양원에서 일하는 남훈 씨의 아내가 변이 바이러스 발생 뉴스를 보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마음 아팠다.
"안 돼! 안 된다고!"
별안간 치솟은 아내의 절규에 남훈 씨는 커피 컵을 떨굴 뻔했다. 아내도 사람인 만큼 이따금 짜증 낼 때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악을 쓰는 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어, 엄마?"
겁먹은 얼굴로 선아가 돌아보았다.
"요양원이고 뭐고 그만둘 거야! 똥오줌 치우는 거 이젠 지겨워. 온통 원망에 질책뿐인 사람들도 진저리 나고!"
그런 다음 아내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비명에 놀라 이웃들이 여기저기서 인터폰을 눌렀다.(102)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발작 반응을 보일까. 코가 다 헐 정도로 pcr 검사를 받으며 환자를 간호하고, 가족들의 원망은 원망대로 받는 요양보호사의 힘듦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기에, 머지 않아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마스크를 쓰고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코로나 시대에 서민들의 삶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이 소설은 제 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1회 수상작이 최문희 작가의 <난설헌>인데 10여년 전에 굉장히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년간 우리 문단의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해왔구나. 신예작가인 허태연 작가의 수상 소감을 보니 작가가 16세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상하며 썼고, 실제 이름을 주인공에게 붙여주었다고 한다. 너무 일찍 헤어져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한 결과가 허남훈 씨라고 생각하니 그를 묘사한 문장 하나하나가 더 찡하게 느껴진다.

요즘 <순례 주택>의 순례 씨처럼 멋진 노년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들이 눈이 띈다. 젊은 세대에게 기대지 않고, 꼰대 소리 듣지 않고,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픈 욕망의 반영일 것이다. 근데 68세에 안식년을 갖는 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여행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녀야한다. 남훈 씨의 추진력을 본받아 일단 항공권을 지르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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