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유진과 데이브

[도서] 유진과 데이브

서수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코리언 티처로 알게 된 소설가 서수진이 좋았다. 이전에 한겨레문학상은 내게 러프한 작품이 수상한다는 편견을 남겼다. 더 고쳐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만 쓸래요, 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초안 같았는데 코리언 티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놀란 점은 인간관계, 언어와 권력과 성애를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구성해내는 돌파력이다.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정갈하게 말하는 직시성이, 다소 느슨한 감이 있어도 그것이 약점보다는 가닿을 수 없는 섬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나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들 힘든 시기를 보냈겠지만 실직한 채 몸까지 망가져 멈춰 서서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면 마지막에 곱씹게 되는 단어가 당혹스럽게도 사랑이었다. 제대로 열어보지 못하고 닫아둔 언박싱 상자 같은 사랑은 내게 절박하면서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 미지의 영역이다. 외국어를 전공한 내 주변인들은 외국인과의 교제에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남자는 억압적이고 답답한 비교 대상이었던 탓이다. 나는 좀 달랐는데 그 이유가 모국어로도 감정과 갈등을 풀어낼 자신이 없음으로 인해 속 터질 게 딱 그려졌기 때문이다.

 ‘유진과 데이브도 첫 작품과 비슷하게 좋았다. 디테일하고 세부적인 묘사는 피해갔다는 서사 관련 인상은 이번에 뭉개졌다.’ 국제 커플의 밀당으로 이야기 전개에 긴장과 탄력을 부여하는 까닭이다. 신기한 것이 그는 감정, 그것도 두 남녀의 가로막힌 넘을 수 없는 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싱그러운 미풍이 분다. 그렇다고 설렁설렁하게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을 방임하지도 않는다. 여러 세트장을 잘 디렉팅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 엉키지 않게 감상하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청춘의 선택지에서 계속 전의를 다듬어 싸우기Fight보다는 도망Flight을 선택한다. 아직 젊기에 궤도 이탈이 가능하다. 하지만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유진의 뭉갠 화풍 이야기는 앞날을 불길하게 내다보게 한다. 세밀하면서도 투명하고 맑은 그림을 완성하고 싶지만 끝내 눈물로 뭉개질 그림picture은 그들의 앞날future이기도 하다. 오년의 사랑을 실패나 잃음으로 단순히 정의하기란 곤란하다. 데이브가 유진의 엄마 집에 걸린 그림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했기에 그는 쪼개진 사이더라도 둘의 포개진 시간을 잘게 반짝이는 밤하늘로 회상할 것 같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유진이 한국 여자라는 정체를 완전히 벗지 못한다는 각성에 있다. 자유와 독립과 평등과 존중을 선망하지만 막상 어느 부분에서는 가부장제 속 한국 남자의 그늘과 보호막을 돌아본다. 한국 여자로서 보호받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아주 사적인 약속”, 즉 꽉 붙잡아줄 말()이 필요한 것이다. 하필 이런 인식은 실직자가 되고 한국인 억양으로 차별을 받는 지점에서 사회적 존재감이 흔들리면서 심화된다. 술집 화장실을 청소할 때 맹렬히 달라붙는 자괴감과 누적된 섭섭함과 고립감은 돌아갈 이민 가방을 싸게 한다.

 

 유진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데굴데굴 굴러서 데이브 앞에 놓인 선 앞에 멈췄다. 그들 사이에 놓인 진하고 명료한 선. 그들이 만나온 5년간 그 선은 점점 더 굵어져 이제 유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데이브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54-155)

 

 서수진의 소설들의 공통적인 매력은 아마 언어화/언어화 되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 유진은 데이브와의 관계에 있어 마음을 제때 읽고 표현하지 않은 채 외면하거나 그냥 넘긴다. 그러나 감정 찌꺼기는 사라지지 않고 습습하게 남아 있다가 악성 곰팡이로 번진다. 모나미술관의 등에 문신이 새겨진 남자 미라를 볼 때처럼 유진을 강타하며 몸의 무엇도 빼앗기지 말라는 경고음을 보낸다.

 한편 데이브 입장에서는 사소한 것에 시비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화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데이브는 자기 취향과 소신이 분명해 흔들림이 별로 없다. 안정적으로 떠 있는 강렬한 태양 같다. 그런 그의 확고한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가 도리어 화근이 되어 유진의 마음을 찢고 떠돌게 한다. 작가가 언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연인의 싸움으로 묘사한 것도 납득이 된다. 말로 정확히 전달되거나 유머로 흡수되지 못하고 확 눌러둔 부정적인 감정들이 부단히 애씀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닫게 했다고 생각된다.

 유진의 고립과 불안을 떨쳐내는 노력은 밥상 배틀마다 압도적인 풍경을 제공한다. 둘만 있을 때는 괜찮던 문제도 가족과 얽히면서 복잡해진다. 영국계 호주인 남자 친구의 집에서의 식사 장면은 데이브가 너무했네로 귀결된다. 실제로 어학교사이기도 한 작가에게 친절’(한 설명)은 몸에 밴 직업병에 가까운 성격 구성요소이다. 결핍이나 부족함이 거의 없는 애인은 너무 환한 햇살 같은 존재인 반면에 역광을 받아 유진 안의 검은 습습함과 구멍을 크게 비춘다.

 한순간 광대가 되고 조롱거리가 된 듯한 불쾌감은 무대가 한국으로 바뀌면서 역치된다. 개인 비서(“남자 수발”)처럼 외국인 연인을 챙겨야 하는 까닭이다. 유진이 웬만하면 참고 양보하며 그의 비위를 맞추는 반면, 데이브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벽에 부딪혀 튕겨 바닥을 뒹구는 작은 공 같은 유진.

 

 이들 커플이 위기와 임계점을 맞이할 때마다 공간이 전환되며 다시 관계를 환기시킨다. 오년의 줄다리기에서 결혼도 아이도 원하지 않는 남자와의 관계가 같이 자는 룸메이트라는 자각을 일으켜 유진은 그만 손을 놓고 만다. “우리 헤어지자.” 유진이 데이브를 떠난 바탕에는 같이 꾸는 미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다. 특히 그림과 관련해서 다르게 다시그리고 싶은 갈망이 유진 안에 자리하고 있다. 현실은 그려보려(응시) 할수록 외면하고픈 두려움과 공허함에 시달리며, 결국 시퍼런 바다가 내다보이는 방은 유진을 캔버스 밖으로 밀어내고 멀어지게 한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유진은 흡연이나 동거나 예술 같은 선진적인 측면은 내세우면서도 전복적인 히피 스타일이나 동성애 가정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애인의 본가를 방문할 때는 음식을 싸고 여성스럽게 옷을 차려입고 주방 일을 거들며 학습된반듯함을 인정받고자 한다. 엄마의 희생과 기대에 못 미치는 뜨끔한 현실을 피해 떠난 곳에서 특정할 수 없는 매정하고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충분히 깨어 있고 독립적이나 어느 순간 남자 혹은 보호자의 안식처를 원하는 연약함이 새어나오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관계에서 시험대가 되는 것은 살아온 방식이나 성격 차이 외에도 엄마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배척할 수 없는 울림으로 유진을 감쌀 때이다. “계속 한국에서 살아갈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한국에서 살아와서 한국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는?(142).” 데이브가 정한 룰에 내맡기면 단순할 텐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유진은 분열되고 마음이 동요되고 걷잡을 수 없다. 섞일 수 없는 경계선 앞에 여러 번 좌절한다이런 감정 소모, 흔히 말하는 시간 낭비가 비생산적으로 반복돼 암담했을 터이다. 데이브는 유진과 동반자로서 함께하다가도 이내 스프링처럼 불가침 영역으로 홀연히 물러나버린다. 너와 나 사이에 그어진 단단한 선을 넘을 수 없음이 포기와 떠남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혼자서도 온전히 선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는 (인류)애라고 정의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휘청대는 동시 상황이 유진을 빠르게 지치게 했을 것 같다. 서른하나에서 시작된 사랑은 서른여섯에 마침표를 찍는다. 투명하고 밝은 그림은 애초에 눈부신 걸 감당 못하는 유진에게 지속가능한 사랑이나 삶의 형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보이는 통창과 고급 가구들 사이에서 세계대전과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질감과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122)

 

 얼마 전까지 나는 국제 커플이 느는 이유가 일상생활은 그리 어려운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순하고 관용적인 짧은 말로도 얼마든지 함께 지낼 수 있다고. 반대로 그 이상을 원할 때 도리어 피곤해진다고. 그런데 소설은 이런 나의 안일한 생각을 비튼다. 서양인들은 밥상에서 정치와 사회 문제를 논하고 개인적이지 않다면 민감한 질문도 서슴지 않는다(우리의 정서와는 반대인 듯하다). 언뜻 보면 역사와 정치와 국제 정세를 대화에 끌어들여 세련되고 성숙해 보인다.

 그런데 질문과 물음이 같은 환경이나 피부색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알고자 하는 욕망(curiousity보다는 inquisitiveness에 가까운)에 치우쳐 너의 입장을 말해보라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면접관의 갑질 행태가 시연되는 것이다. 내가 국가대표나 외교관이 아닌 이상 답하기 난감하다. 질문 속에 자연스레 나를 타자화하여 분리해서 답할 것을 요구한다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없는 여유와 위에서 내려다보는 테이블에 그만 속이 더부룩할 것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