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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도서]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변상욱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진짜 값어치는 남겨진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로 결정된다... 우리가 사는 날들이 모두 우리의 구덩이(파기). 우리는 우리의 하늘을 만들고 있다. (14; 17)

 

 단단한 바가지가 되어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가 달라지니까... 자신은 달이니 높이 빛나야 한다고 기득권처럼 여기거나 자신을 조롱박이라 한계를 짓고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주눅 들지 말자. 마음이 작아지면 나보다 작은 숱한 것들이 커져버리고 나를 짓누르려 한다. (19-20; 24)

 

 걷다 보면 눈과 감성이 넓어지고 섬세하게 바뀐다. 내 이웃 내 주변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부딪히고 스치게 된다. 느끼고 겸허해지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 이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의자와 소파에서 자주 일어나 조금이라도 자주 움직여서 굳은 몸을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 걷고 뛰고 움직이시길... 살아 있음이 드러나면 삶의 의미도 뚜렷해진다. 그렇게 예술이 된다.

 “움직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움직이면 구체적인 답이 나온다.” 웅크린 채로 쥐어짜듯 괴로워하고 아파하면 아픈 사람이 된다... 나는 그대로지만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낀 세상이 보태져 새로운 내가 된다... 나의 여기저기를 느끼고 배운다... 웬만한 건 걷노라면 해결에 이른다. 복잡했던 마음도 무너졌던 건강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또한 외로움도 사라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존재다. 자기 본성을 기술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자기의 본성을 창조해낼 수도 있는 존재다. (35; 39; 41; 47; 49)

 

 거미가 스스로 줄을 뽑아 그물을 치듯, 스스로에게서 생의 의미를 뽑아내 오늘도 스스로를 긍정하는 그가 인간이다... 살면서 알아차린 건데 삶엔 문제가 많지만 답은 더 많다. 그래서 다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이 당신일 수 있다...

 ‘허쉬“No Gain, No Pain”이 등장하는 유서는 뒤틀린 현실에 대한 고발이지 글자 그대로가 해답이 아니다. 공감하되 성찰해야 하고 분노하며 고발하되 해답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건 인생은 합리성과 상식을 뛰어넘기도 한다는 것이다. (54; 56; 73; 101-102)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의 삶의 무게를 그렇게 느끼며 대해야 한다... 글을 읽은 데서 멈추지 않고 글을 쓴 그를 읽는 것까지 한 발 더 들어가 보는 것, 그것이 내 철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눈을 떠 아침을 맞으며 세상을 긍정한다. 내 주변에 이 탁월한 이들(기억할만한 헌신들)에 감사하다...

 어쨌거나 오늘 살아 있고 함께 하고 있어 좋다. 오늘은 더 웃고, 삶을 더 기꺼이 껴안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희망을 품고 더 자신 있게 사랑하면서. (97; 103-104; 239)

 

 우분투Ubuntu 정신을 갖춘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할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뛰어나고 유능하다고 해서 위기의식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우분투 정신을 갖춘 사람은 굳건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비로소 한 사람이다(A person is a person through other persons.)” (107)

 

 겐샤이의 의미는, 당신은 어느 누구도 작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까지 포함해서! 존중은 선택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의무이다. 그것이 세상을 기품 있게 사는 자존감 높은 이의 행동 양식일 것이다...

 내 인생이 들이닥친 고통이나 혼란, 내게 가해지는 불의함과 무례함 앞에서 침착함과 공손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이다. 함부로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 ... 남에게 오는 건 놔두고라도 상처투성이에 배배 꼬인 나를 나로 인정하는 건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상처 입히기 일쑤인 나라는 존재를 환대하고 참아주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

 무엇이든 위대한 것은 나와 너만이 아닌 공동체의 헌신과 지혜와 상호의존 속에서 존재한다 ... 나와 함께 뛰는 이들에게 인사人事할 수 있기를. 그들을 모두 가슴 벅찬 존재들이다. (115; 121-123)

 

 지금의 세대가 격 자체가 떨어진다는 건 착시이자 착각이다. 나는 남들과 다를 것이라 여기는 3자 오류에 속한다... 새로운 시대에 전혀 적응 못하고 있는 교육을 뜯어 고쳐야 하고, 걸림돌인 언론을 개혁해야 하고, 뒤처진 정치를 선진화시키고, “그래서 내게 뭐가 돌아오는데?”라는 질문을 내놓는 불평등 구조를 둔화시켜야 한다. (133; 136)

 

 ‘은 뿌리 깊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형태라는 것이다. (159)

 

 이데올로기는 사유할 능력을 거두어 가고 사유하고 싶지도 않게 만들어버린다. 현실이 사유를 묶어 가두기도 하고 이데올로기가 된 사유가 현실을 더 이상 자유롭게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막아버리기도 한다. 당신이라면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사유하고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

 강요가 될 것이니까. 오히려 인간을 옥죄는 모든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거리를 두라 하고 싶다. 무엇에도 사로잡히거나 종노릇하지 말고 당당히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160; 236)

 

 사람 사는 세상과 그걸 통치하는 집단의 논의는 이렇게 세속 권력이든 종교든 마찬가지다. 인간사니까... “나무에 피어난 것은 나무 아래 묻힌 것에서 온다(프란시스코 베르나르데스).” 균형과 성찰을 외면하고 (로잔 선언에 대해) 왜곡되게 전한 그 결과는 오늘의 전광훈이고 오늘의 보수 극우 개신교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나 개신교, 위에서 예를 든 가톨릭의 미사경본(모두? 많은 이?) 해석에서처럼 보수적 사고와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모두에 대해 거리를 둔다. ‘평등이 부담스럽고 무상에 소스라치며 긴급 재난지원도 선별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책과 이념이 건강성을 잃고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관계가 손상되고 정의로운 생태계가 멀어진다... 서로 다른다는 이유로 소모적인 싸움을 거듭하는 우리를 바로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를 생각하고 모두를 위해 나설 때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함께해야 할 때이다. (178-181)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사랑하고 호흡하는 존재함에 더욱 주목하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늘 새롭게 만나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초심은 그래서 선의 마음이다... 선은 어떤 종류의 흥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 대한 정신 집중이다... 몸이 앉으면 마음도 앉는 것이고 몸과 마음이 앉았다면 그 자체로 이미 진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앉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하는 것이다. (185-187)

 

 (스토리텔링 속) 실제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는 그들의 삶의 기록을 찾아 읽어 나가다 보니 철학은 힘이 되고 사회학은 눈이 되고 역사학은 경험이 되고 문학은 짧고 강한 되새김이 되었다. 그게 나의 저널리즘이기도 했다. (197)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하려면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흘러왔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무엇을 알면 그것을 움직일 수 있지만 모르면 그것이 우리를 휘두른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이념을 어디서 배워 어느 정도 따르고 있다고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좌표를 분명히 하려는 노력은 바람직한데 요즘의 사회는 상대의 좌표를 찍는데 더 골몰한다...

 더 이상의 이해가 필요 없다. 그때부터는 함께할 건지, 거리를 둘 건지, 공격할 건지만 생각하게 된다. 더 불행한 건 ‘00주의라고 명찰을 붙이면서도 정작 그 ‘00주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확고한 신념을 갖추기 전에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내게는 엄격해야 하며 타인에게 관용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 (208-209)

 

 왜 누구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누구를 심판하며 받아줄까 말까를 계산하고 누구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 다니고 웅크린 채 심판을 견디어야 하는가? ... 그 혐오와 낙인찍기는 주술과 다를 것이 없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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