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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도서] 윤동주 평전

송우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동주(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房)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東柱)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윤동주 평전 p.47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1월 30일) 강처중의 발문>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자, 제 한 몸 태워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그라졌던 많은 사람이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학생들, 젊은이들, 영웅들. 우리가 그들의 희생을 고귀하게 여기는 건, 개인의 안녕을 쫓아 불의에 순복하지 아니하고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의가 득세한 시대에 자신의 ‘모가지를 드리우고’(십자가)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눈 감고 간다)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밤이 깊을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나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어둠과 부끄러움이 남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영화 <동주>에서 고등형사에게 취조를 받던 윤동주(강하늘 분)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시)라는 시구에서도 그런 심리를 엿볼 수 있다.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던 섬세한 감성의 시인은 어두워져만 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깊은 탄식을 내뱉을 뿐이었다.


(팔복 자필시 사진 첨부)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는 말이 없이 묵묵(默默)히 걸었고, 항상(恒常)그의 얼굴은 침울(沈鬱)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悲痛)한 고함(高喊)을 잘 질렀다.

“아 ㅡ”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鬱憤)을 주었다.

윤동주 평전 p.47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1월 30일) 강처중의 발문>


그러나 ‘영원히 슬플 것’이라는 비통한 고백도 잠시였다. 총을 들고, 폭탄을 투척하고, 조직을 결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수많은 촛불 중 하나였으나, 그의 심지는 두터웠고 자신을 태우는 분명한 목적과 의지가 있었다. 


이런 동주(東柱)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拒否)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東柱) 자네 시(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하는데 대(對)하여 그는 응(應)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詩)를 탄생(誕生)시킨다...(중략)...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謙虛溫順)하였건만, 자기(自己)의 시(詩)만은 양보(讓步)하지를 안했다.

윤동주 평전 p.47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1월 30일) 강처중의 발문>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박정민 분)의 기개 앞에 윤동주는 질투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동주에게 평소 존경하던 시인 정지용(문성근 분)은 이런 말을 남긴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에게만 부끄러움의 가치가 있다. 일부 윤동주 연구가들은 그가 옥사한 일이 독립운동과 연관이 없다는 식으로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이런 인식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는 ‘지나치게 겸허온순’했지만 양보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족들의 기억과 친구들의 증언에서, 남아있는 기록에서, 그리고 그의 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후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유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창씨개명한 이름이 학적부에 남아있어야 했다. 윤동주의 동경 입교대학에 입학일은 1942년 4월 2일. 창씨개명계를 연전에 제출했던 때는 1942년 1월 29일이다. 마지막까지 창씨계명을 거부한 그의 고뇌는 창씨계명계를 제출하기 5일 전에 쓴 <참회록>에 나타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1942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북간도 용정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 말은 동생들에게 유언이 된다. 또한,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을 기준으로 일본 재판정이 작성한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역설적으로 민족해방을 열망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의 신념이 드러난다.


피고인은 어릴 때부터 민족적 학교교육을 받아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의 조선 통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중략)...조선민족의 현시(現時)에 있어서의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양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문학사상」 1982년 10월호, <윤동주에 대한 판결문> 중에서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라고 고백한지 3년 1개월, ‘시인이란 슬픈 천명’(쉽게 씌어진 시)을 자신의 십자가로 짊어진 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절명하고 만다. 28세 한 청년의 삶은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윤동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영웅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열렬히 타오르던 불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시들은 시대를 넘어,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잔잔한 등불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더 이상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 우리는 무얼 바라 살아야 할까. 시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시대가 지나고 우리에겐 그들이 원했던 자유가 허락됐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부끄러움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다. 명문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일류 기업에 취업하지 못해, 안락한 안식처를 소유하지 못해 우리는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이 한 겹 한 겹 쌓일수록 삶의 민낯이 드러난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까. 다만, 윤동주와 같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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