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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도서]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안도현 편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 나무에 대하여 ]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 이마 ]

                                              -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 모란이 피네 ]

 
                                    - 송찬호

 

외로운 홑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런데 애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그것의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은 모란보자기

 

 

 

[ 휘영청이라는 말 ]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은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 사이 ]

 
                                          - 김수복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이가 참 좋다

 

나와 나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새들과 새들 사이

지는 해오 뜨는 해 사이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 우물 ]

                                          - 이영광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 더 쨍한 사랑 노래 ]

   
                                     - 황동규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 노독 ]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그림자 이토록 낯선

둥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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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벌레

    제목부터 저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책이네요!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2021.06.29 17:02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소라향기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비오는 오늘.. 좋은 저녁 되세요.. 책벌레님..

      2021.06.29 17:44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