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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법영역을 다룬 법학서적에는 '교과서'라 불리는 게 있고, '주해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있다.

전자는 '체계서'라고도 하는데, 주제가 되고 있는 법분야를 서술하되, 1)법현실, 2)법현실을 규율하는 암묵의 법도그마틱(이에는 헌법과의 연역[演繹]적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규범이 포함된다), 3)해당법영역이 보편국제적 성격을 가질 시에는 그 연혁(沿革)과 비교입법례, 그리고 4)자국의 실정법규범에 대한 해설 들을 저자의 개성과 학문관에 따라, 굳이 현행법조의 문언적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말 그대로 체계적으로 써 내려가는 저술이다. 그 '수준'은 일정한 것은 아니라서 초심자를 위한 종류는 초보적 원칙에 대한 설명 위주로 구성되어 분량도 적고 쉬운 편이나, 실무자를 위한 '교과서(어폐가 있는 듯하나 일반인의 착각이다)'는 대체로 큰 볼륨에,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그마틱은 모조리 생략한 게 보통이라, 문외한의 접근이 쉽지 않다. 야심 있는 법학자들의 경우 중언부언하지 않고 필수 불가결의 명제만 유효적절히 배치한 교과서의 저술을 목표로 삼는데, 이런 당찬 의도가 잘 관철된 결과물을 읽는 경우, 그 두께는 얇아도, 잘 훈련되지 못했거나 덜 민활한 두뇌로서는 바로 모세혈관의 경화를 통감하기 십상이다(그냥 유클리드의 기하학 교과서를 연상하면 편할 듯).

후자는 그 나라의 실정법 조문을 나열한 후, 그에 대한 주석을 적은 저술이다. 주석서의 발달은 성경 연구의 한 방법이 법학에도 응용된 결과인데(로마법 시대 이래), 차이가 있다면 속성상 소략할 수밖에 없는 법조문(즉 본문)보다 주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겠다(유교 경전이나 중국 사서의 경우는 주석의 분량이 본문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 주희의 '논어집주'도 그 짧은 본문에 단 주석이 본문의 200%를 채 넘기지 못한다).

포맷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류의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는 결국 동일한 것이어서 독자는 두 책을 독립적으로 독파한 후에도 머리에 정리되어 남아 있는 정보가 동일해야 그 독서가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가 동일한 역사현상을 다루면서도 그 포맷을 '본기-세가-열전', '서-표'등으로 다양화하여 입체적 시야를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사마천이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런 방법론을 한 개인의 힘만으로 고안하여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닌 주해서이다. 내가 정상조 선생님 수업 들을 때만 해도 이 분야 교과서로는 오승종 이해완 공저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고, 역시 이 분야 발전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의 case law가 그나마 아주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던 정도였다. 정 교수님 수업은 어떠했느냐, 음... 사실 '대가'의 수업이라고 해도, 한국 대학 학부 교육의 여건상 그리 생산적이고 익사이팅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없다. 교수님은 물론 한국 탑클래스 레벨이시지만 그 코스가 장래의 법조인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는 부류였냐고 묻는다면 선선히 떠오르는 답은 별로 없다. 내가 들었던 학기의 강좌는 주로 인터넷,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이 토픽이었는데, 중간고사 문제도 그런 쪽으로 출제되었었다. 내 답안에서 제시한 관점이 매우 신선한 것이었는지 교수님이 일부를 기억해서 읽어주시기까지 하던 영광스런 추억도 있다.

이 책은 2007년 말에 출간되었는데도 미처 모르고 있다가 며칠 전 질렀다. 구간이라 쿠폰도 적용할 수 있었는데 게으르게 살았다는 자책에 아쉬움이 더 크다. 판형이 법서 포맷 중 가장 크고 1300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라 가격도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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