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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기 마련이다. 유년시절부터 마지막 학업 과정의 수료에 이르는 동안, 주변의 잘나가는 동료들에게 열등컴플렉스 같은 것만 느껴온 체험이, 그 영혼의 지층 스펙트럼에 있어 코어를 형성하다시피 한 사람이라면(모종의 '성취', 아니 '성취감'조차도 느껴 본 적이 없는), 반드시 40대쯤 들어서 이상징후를 보인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장하거나, 분명 제 자신이 떨쳐 버리지 못한 트라우마 따위에 대해, 애써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태연함을 지어 드려내보이는 식이다. 늦은 나이에 '저걸 왜?'하는 주위의 당혹어린 시선을 받고, 또 평소에 어지간히 남 시선깨나 의식하고 사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실천으로 옮기고야 마는 심리에는, 다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를 그렇게 해서라도 치유하고 넘어가야겠다는 보상심리가 악착같이 작용한다. 요새 '치유','치유' 하며 정작 '치유'를 받아야 어울릴 것 같은 이모저모로 결핍된 인생이 되레 남을 치유해주겠다며 볼썽사납게 설쳐대는 것도, 그만큼 우리 사회에 모자라고 큰 상처 작은 상처 할 것 없이 꾸역꾸역 부둥켜안고 힘겹게 사는 인간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상처란 제 증상에 맞는 적확한 처방이 따로 있는 게 보통인데, 그 처방은 애써 거부하는 게 또 이런 사람들의 심리겠다. 제 영혼의 골수에 깊이 남은 상처를 인정하기 싫어서이고, 그걸 건드렸다간 치유는 고사하고 자신의 영혼이 뿌리채 부정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볼썽사나운 "늦깎이'들이 유독 우리 주변에 많은 게 다 이런 이유에서이고, 지극히 평범한 현상에 과잉문자를 적용해서 빈약한 지식의 (과시 아닌) 자멸적 폭로를 저지르고 만다거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퇴행적 취미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만다거나 하는 게 다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험한 세상 살면서 때로는 '변신'. '변장'도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 다중이가 되어줄 필요도 있긴 하겠으나, 정작 비즈니스나 본연의 업무에서 결정적 한몫을 못하는 처지에, 별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저 정도 에너지를 소모하고 저 빈약한 성과밖에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개탄스러움보다는 가련함의 심정을 느끼게 만든다. 허상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말 거라는 두려움을 애써 어찌 억누를까 하는 애처로움이라고 해도 좋다.


변장의 달인으로 소설 처음부터 설정되고 있는 셜록 홈즈의 경우, 이를 영상물로 옮길 경우 반드시 이 변장의 에피소드, 화소가 치밀한 계산 하에 효과적으로 구축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소설은 사실 이 점에서 대단히 자유로우나(뿐 아니라 명탐정 코난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장르 '애니' 역시 그런 편이다), 정극의 형식이라면 사실 만만찮은 작업이라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보는 이의 착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게다가 원작 소설에서 '변장의 달인' 따위로 예비 학습까지 거친 더라 결과는 더함), 드라마 속에서 빼어난 변장으로 소기의 효과를 거둔다면 그 공은 해당 배우가 아닌 분장팀에 돌아가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숨어서 고생하는 이들에겐 다소 억울할 수 있지만, 우리 어리석은 관객들이 그저 '하, 기가 막히는걸?'하며 때로 쓴웃음을, 때로 격한 찬사를 보내곤 하는 반응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배우이지 무대구축진이 아니다. 다만 다소 공평한 건 그 실패의 경우 허물 역시 배우에게 돌아가서, 예를 들어 19668년작 '닥터 지바고'의 경우 알렉 기네스의 청년 분장은 너무나도 어색하여 보는 사람이 그 시대라고 해도 민망했을 것 같기만 한데, 비웃음은 이 대배우에 귀속할뿐(같은 씬에서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그 경이로운 연기에도 불구하고 말임), 일을 sloppy하게 처리한 제작진이 욕먹는 건 차라리 드물게 목격된다. 이 그레나다 시리즈 이 편의 경우, 사실 가장 쉽게 처리가 가능한 게 병자의 분장이기도 하므로, ㅎㅎ 소설 속의 설정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멀쩡한 사람이 혼자 힘으로 아픈 척 외양을 꾸미기가 힘들지 이 정도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기획에서 저런 모습 잠시 연출해내는 거야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겠다.


제레미 브렛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기에 이미 위험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휴 뭐 분장할 수고가 불필요해서 좋겠구만?'하는 농담은 제 품위를 생각해서라도 삼가야하는 말이긴 하다. 근데 보는 우리가 감탄하는 점은 당연 그 세팅이 아니라, 예를 들어 왓슨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할 때 ,'물러서!'를 앙칼지게 외친다거나 하는 그 연기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는 어조의..'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作中 왓슨이 둔해서라거나 (캐릭터로서)홈즈의 스토리상 연기가 그만큼 완벽했겠지라며 걍 애써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이 드라마에서 브렛(캐릭터 홈즈 아님)이 보이는 목소리톤 역시, '보는 시청자가 여태 못 접해 본 앙칼진 높은 톤'이었다는 점은, 그 불타는 (그리고 장엄한 사멸을 곧 맞게 될)연기혼이, 대본을 넘어 (이제는 고전이 된)원작의 흠이나 부실함마저 그 위대한 재능이 모조리 감싸안을 수 있는 스케일까지 빚어낸,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의 명품이었음을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에조차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앞서 말했듯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때를 놓친 뭔가 크게 결핍된 인생, 출생의 초기 조건부터 한 삶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 중요성을 차지하는 청소년기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까지 결정적인 자양분이 결핍된 인생에게는, 끊임없이 그 부족함을 잘못된 방법으로 만회해보려는 무한반복의 퇴행적 자가 치유 시도가 있기 마련인데, 당연한 이치지만 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적잖이 먹은 나이에도 유아취미(끔찍하고 징그럽다)에 집착한다거나, 제 교양의 부족과 텅빈 머리를 위장하는 외부과시적 독서 편력의 어중띤 나열이 그것인데, 흔히 우리가 된장이라고 부르는 족속의 전략과는 달리, 지방 거주라는 현격한 핸디캡(사실 촌구석에 살아도 인간이 똑똑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건데 이건 타고난 머리도 대책없는 철덩어리라 뭔 방법이 없다)이 작용한다는 이유가 추가되어, 어떤 아이템을 전면에 내세워야 가증스러운 위장이 그나마 빈약한 효과라도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는 맹탕의 헛발질을 계속하는 가련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내일부터는 진정 무가치, 무의미한 작업이지만, 제 주제를 깨닫지 못하는, 된장 축에도 못 끼는 가련한 깡통인생에 대해 잠시 논해 보고자 하니 팬 여러분께선 마는 기대 바람니다요.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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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조르주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아무 관계없음. 이제 아주 굳어버린듯?

    2012.05.24 04:24 댓글쓰기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