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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며칠 전 국내에서 그 번역판이 나온, 콘돌리자 라이스의 회고록이다. 그런데, 며칠 전이다 뭐다 하는 건 국내 사정일 뿐이고, 이 책의 원판은 이미 작년에 미국에서 발간되었다. 구미에서는 책이 갓 나올 시점에는 익스클루시브하게 하드커버 에디션으로만 팔다가, 1년쯤 지나 신간에 대한 호기심, 열기가 시들해지면 페이퍼백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미국이라면 지금 막 문고판을 팔기 시작할 무렵이고 여기에 대략 맞춰 한국어판이 등장한 셈이다(그러나 우리말 번역서는, 비교적 싼 가격인 편인데도 하드커버 장정을 꾸려 내었던데, 내 손에 들어오는 대로 읽고 나서 추상같은 리뷰를 올릴 생각이다).


위 사진의 표지를 하고 있는 책은 작년 12월경 내가 구해서 완독했었다. 우선 제목을 좀 보자. 'A Memoir of My Years in Washington'이라고 서브타이틀이 달려 있으며, 서문에 보면 그의 거주 아파트가 '포기 바럼(DC내 근린주거지구이자 미 국무성의 대용어구임. 다우닝가 10번지가 영 수상 관저를 대뜸 떠올리게 하듯)'과 가까워서 참 좋았다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초짜 직장인의 푸념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그녀는 살과 피로 된 인간이 아닌, 강철이 그 근육을, 아라미드 섬유가 핏줄과 신경을 이루는 신인류 아니었던가? 예외 없는 칼 같은 규율이 정신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여전사의 입에서 저런 약한 말이 나오는 건 범인의 기대를 크게 배반하는 느낌이다. 그 빈틈 없이 단련된 육신과 영혼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건대,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이 아닌, 거의 대학 졸업 후 평생에 걸쳐 공직에만 있었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우리 식으로 따지면 행시 재경이나 외시에 약관의 나이로 붙어 초고속 승진으로만 커리어를 메우는 모씨를 연상하게 하는...), 사실 그녀는 본업이 학자이고, 레이건 행정부 때에 외부 전문가 초빙의 형식으로 30대 초반에 국장직을 맡은 게 그 공직 생활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잠시 강단으로 복귀했다가, 우리가 아는 대로 부시 주니어가 당선하면서 다시 공적 섹터로 컴백했을 뿐이다. 전형적인 귀족의 행적이다. 그녀의 피부색과 피처가, 배운 것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연상시키는 바가 무엇이든 말이다.


그녀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닌 채, 수퍼스타로서 좌절 없이 인생을 꾸려 나간 케이스에게 어느 순간이건 각광과 영예 없었던 때가 있었겠냐만, 내 기억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씬은 부시 주니어가 재임할 당시 어느 청문회에서 국가안보보좌관 자격으로 나와 '상황을 진압'하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는 우리가 잘 알듯,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이라 '진압'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와 흔들림 없는 침착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이 병신들아(듣는 사람은 전부 쌔니터들임), 니네가 지금 지껄이는 그 무수한 근거 없는 개소리들이, 나의 뛰어난 지성으로 얼마나 손쉽게 논박될 수 있는지를, 내 이 유창한 논변을 듣고도 채 깨닫지 못하겠느냐?"

라고나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언사와 어휘들이야 현생 인류 중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이들의 솜씨 가운데 최고급의 것만 골라 뽑는 것들이라. 그 숨은 의미는 더더욱 소름끼칠 뿐. 사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람인 줄 아니? 뭐 이런 역설적 웅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등장과 더불어,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의회 차원에서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이후 이 이슈(911 테러 사전 인지 및 직무 유기 부실 대응에 관한 큰 논란)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안 나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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