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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

[도서] 앙드레 말로

Christian Biet외/은위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불어의 앙가쥬망과 영어의 인게이지먼트는 철자가 같고, 유난 떨며 별스러운 데서 다 차별성을 강조하려 드는 프랑스인의 주관적 코르푸스에 일단 시선을 두지 않는다면, 그 뜻도 거의 같은 편이다. 우리말로는 '현실참여'라는 건조하고 딱딱한 용어로 번역되기 일쑤이나, 이 단어는 그보다는 훨씬 폭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환기하는 감정적 심상은 대체로 단순하다.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엮임, 얽혀듬'의 뜻이다. 숭고한 존재는 일관성과 순일성이 그 핵심적 가치이나,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실존은 '내버려 두면 썩'게 마련이다. 해서, 실존은 대체 그 속성상 한자리에 가만 있질 못하고, 타자와 환경에 끊임 없는 컨택을 시도하여 화학 반응을 유발하며, 급기야 물리적 본성까지 변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튐'이 안착이며, 변화무쌍이 그 정성(定性)이니, 예를 들어 장 주네 같은 이가 소년 시절 잠시 매춘에 종사하는 타락을 겪었다 해도, 그건 오히려 치열한 준위의 에너지를 증명함이지 치욕의 주홍 글씨가 될 수 없다는 식이다. 좋게 보아 청춘과 정열의 발랄함이요(이런 배경이 감상의 전제가 되어야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청소년 포르노로 보이지 않는 법), 나쁘게 보아 버르장머리를 망친 가망 없는 어린것들의 분탕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데, 알고 보면 지성인이라기보다 연예인에 가까웠던 사르트르들의 모순 가득한 행각도 기실 그 깊이가 빤한 탓이기도 하다.


말로를 다룬 많은 책들은 그가 24세 때 벌인 '반티아이스레이' 사원 도굴 사건에 대해 모호한 서술로만 처리하고 넘어간다. 분량도 적은 이 책은, 말로 부부가 사건 직전 투자상의 실책으로 파산 지경에 달했음을 명확히하고 있고, 이어진 '소동'은 그 경제적 빈궁을 탈피하기 위한 명백한 절도임을 (단정만 않았다뿐) 독자에게 친절히 '설득'하고 있다. 그의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내면의 동기가 어떤 형이상학적 합리화의 근거를 제공하건 말건, 식민당국이 (그 주인인)원주민으로부터 침탈한 자원을 돌려 주는 행위도 아닌, 현지에 마땅히 보존되어 있어야 할 문화재를 자신의 소유로 영득하려 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는 수치스러운 도굴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허나, 이 책에서도 잘 서술하고 있듯, 말로는 그가 편집자로 일했던 '악시옹'에서 희대의 살인자를 찬양한 바 있으니, 대전의 참화로 셀 수 없는 인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는, 이미 도덕적 파산을 선언한 지배체제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몇 명의 무고한 목숨들을 희생자 명단에 추가한 그(살인마)의 행위는 몸으로 보이는 체제 전복의 선언이었다는 취지다. 이런 맥락에서, 식민 당국의 현지인 말살, 착취의 추악한 행정을 폭로하기 위해, 차라리 반어적 매니패스토로 그는 '대놓고 도둑질'이 타당하다고 판단,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는 정도로 스스로를 변호한다. 대체 이런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야 독자의 양식이 판단할 일이겠고, 중요한 건 이 책의 경우 말로와 그의 변호인단의 그런 (억지)논리를 자세히 싣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주네가 남창이었듯, 말로는 거의 같은 의미와 정도로 '도굴꾼'이었다는 결론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게 말이다.


사르트르들과는 달리, 말로는 소위 '입진보', '리무진리버럴'에게 별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는, 골수 민족주의자요 누가 뭐래도 정통 우익인 드골 장군의 대열에 서서, 좌파의 이상과 혁명의 이념을 확실하고 화끈하게 등지는 선택을 2차 대전 직후 요란하게도 대중 앞에서 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화부 장관 입각이라는 현실에서의 영예까지 뒤따랐기에, 나름 고독한 내면에의 침잠이나 인도주의, 박애의 명분으로 소련 등의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한 까뮈나 지드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는 여러 모로 색깔 분명한 변절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특정 이념의 선험적 타당성이란 도무지 증명될 길 없는 난제요 블랙홀임을 늦게서라도 깨달을 만한 이라면, 말로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난감함이란 어느 편에 줄을 섰느냐의 문제보다, 차라리 다른 쪽에서 당혹감을 느껴도 느낄 법하겠으니... 그건, 대체 한 사람이 비판이건 찬양의 대상이 되건 그 전제로서 파악되어야 할 정체성 이슈에서, 이처럼이나 변화무쌍한 '실존적 행로'를 보인 이라면, 과연 생의 어느 국면에서 던진 무슨 말과 작품을 기준으로, '그는 ....이었다' 식의 언도를 내려야 하는가 하는, 바로 그 점이다. 과연 실존의 외피와 쉴드는 착용하거나 두르기 편한 것이, 이 말로 같은 이야말로, 혹여 누가 "넌 대체...?"하고 물으면, 태연하게 "나? 나지 뭘?"하고 되받아치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 자가 침노한 그 동양의 사원에서 모시는 대각성인이라면 염화시중의 미소까지 부가서비스로 머금기라도 해야 가일층 뽀대나는 광경이었겠지만, 타인에 대한 호감의 표현에 인색했던 '역사적 그'를 떠올린다면 담배 한 개피 머금은 더러운 썩소가 저 퉁명스러운 대답의 액세서리로 아마 제격이지 싶다. 그저 정신 없는 수다와 우아함 가득한 손놀림, 현란히 돌아가는 스텝에 묻혀, 구경, 동참하는 이로 하여금 본연의 자신을 망각하게 하는 이 재기발랄한 퇴폐남과 그저 엮이지 않기만을 시(時)의 작금을 넘어 범인(凡人)이야 소망, 유념할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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