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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도서] 설계자들

김언수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사람들은 나 같은 악인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악인은 지옥 같은 데 가지 않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니까. 마음속에 한 점의 빛도 없이 매 순간을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게 지옥이지. 언제 표적이 될까, 언제 자객이 올까,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게 바로 지옥이지." p.394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 버려진 건지 아니면 그 안에서 태어난 건지 모를 래생은 4살 때까지 그곳 부속 고아원에서 자라다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으로 입양됐다. 자신에게 살갑지 않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서 래생은 혼자 한글을 익혀 책을 읽었고 17살부터는 그곳 소속의 자객이 되어 사람들을 죽였다.

 

그렇게 15년이 지나 30대에 접어든 래생은 요즘 이 바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90년의 세월을 버틴 도서관과 너구리 영감이 업계 사람들의 은근한 외면을 받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보안회사를 운영하며 뒤로는 정치, 경제계 거물들의 의뢰를 받아 사람을 죽이는 한자가 그 폭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 역겨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저 황량한 세계에 홀로 던져지는 두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넓고 깊게 번지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p.59

 

 

 

오랜 세월의 전통을 가진 도서관과 젊은 한자의 밥그릇 싸움이 주된 사건이었지만, 그 안에는 래생의 인생이 담겨있었다. 너구리 영감의 오른팔이었던 훈련관 아저씨에게 기술을 배워 실전에 투입된 후, 그는 이 바닥에서 제법 오래 버텼다. 한때는 얼마간 은거해야 했을 정도로 큰 실수를 했음에도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죽이지 않았다. 아마 그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은거 중에 래생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에게 반해 위조된 신분으로 공장에서 일하며 그녀와 가까워지고 동거까지 하게 되지만, 래생은 이런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태생부터 평범하지 않았던 그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꾸려 알뜰살뜰 돈을 모으며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훈련관 아저씨가 죽고, 최고의 자객이었던 추가 설계자의 목표물을 살려준 이후 도망을 다니다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중엔 너구리 영감의 눈가 귀가 되어주며 정보에 빠삭한 정안마저 칼에 난자되어 죽었다. 그때 이후 도서관에 붙어있는 사람은 래생뿐이었고, 그럴수록 한자는 너구리 영감과 도서관을 칠 계획을 짜며 래생에게 넘어오라는 제안을 한다.

이런 와중에 래생은 집 변기에서 소형 폭탄을 발견하고 제조한 자를 찾다가 법의학자인 설계자의 조수 미토를 만나게 되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간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너구리 영감도, 추도, 털보도, 미토도, 이발사도 그리고 심지어 한자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으로 분노를 키우고, 서로를 증오하고, 또 서로를 죽인다. 모두들 자기 사연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상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할까? p.350

 

 

 

칼을 쓰고 때로는 총을 쏘며 사람을 죽이는 자객이 대한민국 한복판에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만, 이런 설정과는 별개로 소설은 몰입도가 엄청났다.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래생의 의리와 삶에 대해 보여주는데 어찌나 가여웠던지 모르겠다. 쓰레기통에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며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라곤 도서관의 훈련관 아저씨와 추, 그리고 정안뿐이었는데 그들 모두 죽어서 돌아왔으니 꼭지가 돌아버릴 만도 했다. 거기다 이제는 아버지나 다름없는(아니라고는 하지만) 너구리 영감마저 끌어내리려고 했으니 한자와 반드시 담판을 지어야 했다.

경호원들을 데리고 좋은 차를 몰며 비싼 양복을 입고 자신은 이 바닥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외적인 면에서부터 뽐내려고 애를 쓰던 한자가 진짜 얄미웠다. 솔직히 말하면 재수가 없었다. 등장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싫은 캐릭터였지만, 어느 곳에나 이런 캐릭터는 꼭 있기 때문에 박살 나는 끝을 보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서 좀 아쉬웠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고 찾아보니 결말을 다듬었다고 그러던데 내가 읽은 책과는 다를 것 같아 궁금해진다.

 

김언수 작가님의 책은 <뜨거운 피> 이후 두 번째로 읽는 건데, 앞서 읽은 책처럼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동안 글이 머릿속에 화면으로 자연스레 그려졌다. 지독하고 피 냄새가 진하게 나는 누아르에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이라 영화로 만들어도 정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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