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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도서] 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저/이은선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피터는 말을 하다 말고 내게 웃어 보였지만 애정이 담겼으되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 미소를 본 순간 알 것 같았다. 그에게 나는 무대 소품이었다. 말 없고 단단한 이차원 그림이었다. p.100



설문조사 회사에서 일하는 메리언은 자유분방하고 다소 지저분한 룸메이트 에인슬리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다. 메리언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여성이라 자유로운 에인슬리와 주인집 부인 사이에서 나름의 중재를 하며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회사에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동료인 미혼 여직원들과 성격이나 생각 등이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아도 적당한 교류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수습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멋진 남자친구 피터가 있다. 여러모로 메리언은 더없이 평범하고 무난한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한 증상이 생긴 건 피터와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였다. 피터와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없었던 증상이 그 시작이었다. 메리언은 엄청나게 배가 고팠지만 스테이크를 도무지 입에도 댈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모든 육류를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증상은 더욱 심각해져 달걀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양껏 섭취할 수 있었던 채소류까지 먹을 수 없게 된다.



메리언은 소설 속에 인용된 것처럼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의 정상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다니며 나름 인정을 받았고, 괜찮은 남자친구도 있었다. 룸메이트인 에인슬리나 클래라에 비하면 진짜 평범하다고 볼 수 있는 여자였다.
에인슬리는 소설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였는데, 자기주장이 확실한 면이 돋보였다. 그녀가 여러 발언을 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자신에게 남자는 필요가 없지만 아기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훌륭한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낳기 위해 만족하기 어려운 조건의 남자를 찾아 임신만을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제일 비상식적인 캐릭터였다. 그리고 클래라는 대학에 다니던 중에 아기가 생겨 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벌써 두 아이를 두었고 뱃속에는 셋째까지 있었다. 클래라는 남편 조가 보살펴주는 모든 것을 받기만 하며 무기력한 모습만 보였다. 계속 임신 중이라 어쩔 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수동적인 여성으로만 보여 그녀는 나약하게만 느껴졌다.
메리언의 주변 인물들이 이렇다 보니 그녀가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에인슬리는 얌전히 있었는데 당신은 왜 그랬어? 당신은 뭐가 문제인가 하면." 그는 매정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주어진 여성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거야." p.113

"어쩌면 당신은 시스템에 반항하는 현대 젊은이를 대변하는 중일지 몰라요. 소화기계통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정통이 아니지만. 그래도 뭐 어때요? 나는 어차피 예전부터 먹는다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할 수 있으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요." p.265




메리언은 남자친구 피터와는 잘 지내는 듯 보였으나 그는 시대에 맞는 남자라 어느 정도의 남성우월적, 가부장적인 면모가 얼핏 보였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굳게 뿌리박힌 사람이었다. 그래서 메리언과 갈등이 있기도 했는데, 그 상황에서 알 수 있었던 건 메리언이 시대를 거스르는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한 페미니스트인 에인슬리와 수동적인 클래라를 절충한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설문조사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면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피터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설문조사를 하러 나갔다가 만난 대학원생 덩컨과 더 깊은 관계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덩컨은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관심이 있는 주제, 사물 등 외에는 어느 것에도 그러려니 하는, 다소 무심한 성격처럼 느껴졌다. 상식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메리언이 피터와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를 시작한 뒤에도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던 걸 보면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간에 현재 그녀에게 그 정도의 관심은 있는 것이라 느껴졌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다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할 준비를 시작하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불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가만 보면 심리적인 압박감이 메리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인생이 있고 여성성이 있는데, 피터와 결혼을 약속하면서부터 그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특정한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요가 강압적이든 에둘러서 요구되는 것이든, 어찌 됐든 메리언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면서 메리언의 몸이 음식을 거부하게 된 것이었다.
메리언은 그런 증상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결혼할 피터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고, 수군거리기 좋아하는 회사의 미혼 동료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에인슬리는 임신 프로젝트로 바빴고, 클래라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까지 세 아이들을 돌보기에도 고단했다. 결국 메리언은 덩컨에게만 털어놓게 되는데, 그는 그녀의 증상을 듣고도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자신도 음식을 그리 먹고 싶지는 않다는 공감 아닌 공감을 하기도 했다. 덩컨의 반응이 이렇다 보니 메리언은 비윤리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독특한 그를 가까이에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지? 나를 동화시키려고 하고 있지? 하지만 내가 대역을 만들었어,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만한 걸로. 당신이 처음부터 진심으로 원했던 건 이거 아니야?" p.376



스테이크는 물론이고 채소까지 먹을 수 없게 된 메리언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피터를 초대해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마지막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메리언이 강요받는 여성성을 피터가 자신을 먹어 치우려는 행위라 여기고 대체재를 만들어 먹게끔 하는 게 그로테스크했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고 본다.
피터가 메리언이 만든 그것을 보고 도망친 후에야 그녀는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 피터와 주변 사람들이 강요하던 약혼녀로서의 의무와 여자에게 요구된 모습을 먹음으로써 사회의 시선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이때 덩컨이 피터와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보였던 걸 보며 독특하긴 해도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1969년에 출간된 소설이지만 페미니즘 열풍인 지금 21세기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여자에게 강요되는 행동이나 의무에 젖어들기보다는 스스로 깨버리는 메리언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 임신을 하고 난 이후 뒤늦게 아기 아빠가 필요해진 에인슬리나 여전히 남편에게 기댄 클래라보다 훨씬 이상적으로 느껴진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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