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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이브

[도서] 더 파이브

핼리 루벤홀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그때부터 지금까지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케이트, 메리 제인의 이야기에 달라붙어 그 형태를 결정해 온 것은 다름 아닌 빅토리아 사회의 가치관이다. 성별은 남성이고 성격은 권위적이며 계급은 중산층인 그 가치관 말이다. 그 시대 여성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거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 시대 빈민은 게으르고 타락한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여성이자 빈민인 사람은 최악의 교집합에 속했다. 지난 130여 년 동안 우리는 저 시대에 만들어진 먼지투성이 짐 꾸러미를 꼭 껴안고만 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려 하지 않고, 피해자들이 어떤 사람이며 그들의 진짜 역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꽁꽁 싸맨 그 두꺼운 포장을 풀 생각도 없이. p.32~33



1888년 8월 31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에서 폴리 니컬스라는 여자가 살해됐다. 이후 9월 8일에는 애니 채프먼, 9월 30일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와 캐서린(케이트) 에도스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11월 9일에 메리 제인 켈리가 자택 침대에서 훼손된 채 발견됐다. 이 다섯 여자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이들 중 네 명은 내장까지 뜯겼다. 메리 제인을 제외하면 모두들 어두운 야외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경찰은 범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단독범인지 공범이 있었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잭 더 리퍼'라 불리게 된 희대의 연쇄 살인마를 잡기 위해 경찰은 애를 썼을 테지만, 언론은 오로지 선정적인 기사를 뽑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윤색되고 날조한 이야기인 가짜 뉴스를 실으며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잭 더 리퍼의 살인이 일어난 곳이 빈민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해자 여성들은 매춘부라고 단정 지어졌다. 그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후 1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피해자 여자들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을 뿐 매춘부라는 날조만 진실로 남았다. 그리고 잭 더 리퍼의 명성 아닌 명성만이 드높아졌다.

저자는 끔찍한 연쇄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름에 가려진 여자들의 삶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식시켜주고 진정한 삶을 되찾아주고자 이 책을 썼다.



지주와 고용주는 집이나 회사에서 합법적이지 않은 커플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쫓아내거나 해고했으며, 이에 뒤따르는 모든 사회적 지탄은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다. 남자는 동거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 있고 그 어떤 뒷일도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반면, 그동안 스스로 돈을 벌 능력은 줄고 먹여야 할 자식들이 생긴 여자는 곧 극빈 상태에 빠졌다. p.299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케이트, 메리 제인은 태어난 첫날부터 그들에게 불리한 게임에 참여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 모두가 여자로 태어났다. 그들은 말을 배우기도 전부터 같은 가족의 남자 형제보다 덜 중요한 존재, 다른 계급 가족의 딸보다 더 많은 짐을 져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러 나서기도 전에 가치를 절하당했다. p.392~393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던 메리 제인 외에 다른 네 명의 여자들은 평범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들 중 몇몇은 당시 계급의 여성들과는 달리 학교 교육을 받아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기에 조금은 나은 형편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에 현실에 들이닥친 여러 문제들이 그녀들을 괴롭혔고, 극빈 상태에 이르게 했으며, 구빈원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도 아내에게는 이혼을 청구할 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구빈원에 스스로 걸어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남편은 결혼 생활에 있어 아주 자유로웠고, 아내 외에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들이 싸워서 남성과 같은 권리를 얻은 게 1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연한 사회적 멸시였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할 수 없는 현실에 공식적인 별거로 진행되면 홀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의 사정은 나빠지기만 했다. 여기에 아이들까지 부양해야 한다면 죽기 직전까지 극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알코올중독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남자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행위에 대해 관대했던 반면, 여자들에게는 죄악으로 치부되어 남편은 물론이고 여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외면을 받았다. 술에 대한 의존증은 성별의 문제가 아닌데 여자들에게만 엄격했던 건 보수적인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잭 더 리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1888년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일련의 가치관, 즉 여자들에게 너희는 가치가 적으니 치욕과 학대를 당하리라고 가르치는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쁜 여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고 '매춘부'는 여성의 하위종이라는 관념을 강화하는 것이다. p.402~403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에 희대의 연쇄 살인마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음 이후 윤색된 거짓으로 오랫동안 모욕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삶이 너무나 기구해 더없이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잭 더 리퍼의 뒤틀린 명성에 가려진 다섯 여자의 이름과 그녀들의 삶, 그 속에서 가졌을 희망과 미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름과 행각만 알고 있었던 잔인한 살인마 잭 더 리퍼가 제발 끔찍하게 죽어서 지옥에서라도 고통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잔인한 가해자보다는 피어나지 못했던 피해자의 삶을 기억하고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잡으려 한 저자의 마음이 깊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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