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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도서]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장 지글러 저/양영란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이 책의 저자는 유엔 최초로 식량특별조사관을 지낸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다. 저자는 식량특별조사관이라는 다소 생소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세계 각국의 처참한 빈곤 현실을 목도했다. 그 영향이 큰 탓일까. 책에서 저자는 일관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비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사유재산에 대한 부정적인 저자의 견해도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의 식인 풍습은 뿌리 뽑혀야 하지.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이루어낸 눈부신 성과는 보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강화되어야 하기도 한단다. 인간의 노동과 재능, 천재성은 공동의 선, 즉 우리 모두의 공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마땅하지. 소수의 안락과 호사, 권력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야.

p22

나는 평소에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자연의 섭리처럼 거스를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가 아닐까. 만약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온하고 반체제적인,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의 분위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발전과 개선의 여지는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인간이 유례없는 물질적 풍족을 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물질적 풍족이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불평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산업혁명 초기,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지역에서 전리품들을 약탈함으로써 초기 자본을 형성했다. 현재 유럽의 부富는 원주민들의 피와 눈물로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땅에 쓰인 모든 역사가 그런 식 아니었나. 앞으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된다 해도 선진국들이 적당히 둘러대며 말하는 식으로 '이제까지 그래왔으니까' 혹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로 퉁칠 수 있을까. 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 상위 85명의 부자들이 소유한 부富는 세계 하위 빈곤층 35억 명이 소유한 부富와 맞먹는다고 한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전 세계 인구 중 10억 명가량이 극빈층으로 분류된다. 이들에게 내일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당장 먹을 것을 섭취하지 못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환경에서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한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비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기업들의 궁극적인, 제1의 목적은 이윤의 추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획득한 잉여 가치를 노동자에게 분배하기를 꺼린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최소한으로 줄어야 기업들의 이윤이 늘어나니까. 책에서 등장하는 예시는 충격적이다. 선진국에서 7만 원이라는 가격에 팔리는 청바지가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그 청바지를 생산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7만 원 중 320원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보고 누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세상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위주로 돌아간다. 세상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콩고물이 떨어지거나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주장하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자는 주장은 다소 과격하게 들렸다. 사회의 불안을 야기하는 씨앗을 제공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불평등이나 양극화, 환경 문제와 같은 도무지 해결 불가능할 것들을 보면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저자에게도 체제에 관한 뾰족한 대안은 없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이들도 뚜렷한 대안을 갖고 혁명을 이룬 게 아닌 것처럼. 하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그런 유토피아와 같은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말한다.

거의 매일 산업재해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들은 몇 백만 원의 벌금만 내고 책임을 벗는다. 그냥 벌금만 조금 내면 끝나니까 굳이 노동자들의 안전과 관련한 시스템을 바꿀 필요는 없다. 이런 비극이 반복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 거대 양당은 비극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밥그릇만 차지하려고 안달이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가 말하길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더 고통스러울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코로나 이전의 수준으로 다시 돌려놓는다며 희망고문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장밋빛 미래를 언급하기보다는 국민들의 고통 분담을 공론화할 때라며. 특정 계층에 고통을 몰아주기보다는 모두가 조금씩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다. 인간의 죽음을 범사로 여기는 시대에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지만 필요하다.

당연하다 생각한 것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운이 좋아 북반구,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나로선 상상도 못할 정도의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많은 이들을 생각해보았다. 강자가 약자들을 약탈하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 인간이 추구하는 마지막 사회의 질서인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소비 사회는 그 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위해 '풍요'라고 하는 것을 창출해냈어. 소비 사회가 섬기는 여신이란 다름 아니라 상품들이지. 소비자들은 상품에게 영혼을 파는 셈이야.

p89

소외란 대단히 신비로운 과정이란다. 소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거든. 이 할아버지 생각엔 네가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할 것 같구나. 왜냐하면 소외야말로 자본주의자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휘두르는 무기니까 말이야. 소외는 우리 모두를 위협하지. 너도 물론 거기 포함되는 거고.

세계주의자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공동의 이익,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지킨다'고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어. '소외'의 역할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잇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파괴하고, 그에게서 자유 의지와 자유롭게 생각하고 저항할 역량을 빼앗는 거야. 요컨대 각 개인을 상업적인 기능만으로 축소시키는 거지.

p157

나는 반계몽주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시장의 힘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소비자들에 대한 조종 행위 등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인단다. 환경 파괴, 천연자원의 과도한 개발, 서서히 진행되는 지구의 죽음 등은 한마디로 잔학함의 끝이지.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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