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잊지 못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한다면 그 기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몇 개의 기억은 그 반대다. 지울 수만 있다면 흔적도 없이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주인공 소년이 기억하는 5년 전 사건처럼 뿌듯한 기억이 없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 쓰라렸다.
아홉 살 톰이 우연히 만난 여우로 인해 마음이 성장한다는 줄거리는 아름답고 뭉클하다. 부모님의 여행으로 여름방학 두 달을 이모 집에서 지내야 하는 톰. 처음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눈물이 난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일이기에 이모네 농장에 가기로 결심했다. 플라스틱 조립장난감을 좋아하고 친구 피티와는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각별한 사이지만 톰은 어쩔 수 없이 농장으로 간다. 농장에 가기 싫은 이유는 많지만 동물들과 친해본 적이 없어서 더 끔찍하다.
하지만 농장 주변에서 검은 여우를 우연히 본 후 톰은 주변의 모든 것이 갑자기 굉장히 흥미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운명의 시간을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었다. 톰이 오랜 인내 끝에 검은 여우의 굴을 보게 되고, 그곳에 새끼 여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후 보여준 행동은 뜻밖이었다. 여우가 서식지를 옮길까봐 톰은 여우 굴 근처엔 가지 않는다.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여우와 잠깐 스치는 순간에 만족할 뿐이다. 사랑한다면 무시무시한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톰에게서 배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우가 이모네의 칠면조와 암탉을 채가면서 위기가 닥친다. 노련한 사냥꾼인 이모부는 여우 사냥에 나서고 톰은 어쩌면 자신이 여우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이모부 뒤를 따른다. 그리고 이모부는 새끼 여우를 포획한다.
톰은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이모부에게 잡혔을 때 새끼 여우는 죽은 척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와 있을 때만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을 즐거이 뛰어다닌던 새끼 여우가 위험한 순간임을 감지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죽은 척 하는 모습이라니.
새끼 여우를 빈 토끼장에 가두고 검은 여우를 기다리는 이모부 곁에서 톰은 안절부절못한다. 자신과 처음 마음을 주고받은 동물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없이 불안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간은 검은 여우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맞게 폭풍우가 쏟아지고, 붙잡힌 새끼를 위해 철장 앞에 죽은 개구리를 놓아 둔 어미 여우의 마음과 새끼 여우를 풀어준 톰의 용기가 포개지더니 마침내 두 마리 여우가 밤의 숲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읽을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진다.
서로 처한 상황이 달랐을 뿐 등장인물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 애써 기르던 칠면조와 닭을 잃고 화가 난 이모는 물론 새끼 여우를 잡아놓고 총을 겨누던 이모부도 톰을 나무라지 않는다. 기껏 탓을 하는 것이 8월 무더위다. 두 달 후 집으로 돌아온 톰에게 조립장난감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한 생명에게 다가가 애정을 품었던 일은 이렇게 마음을 성장하게 했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었어도 읽을 때마다 재미있다. 책에 별 관심이 없는 아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톰과 피티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화와 톰과 여우, 그리고 이모부와의 밀당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지며 흥미를 느낄 것 같다. 여름이면 늘 생각나서 다시 찾아 읽게 되는 어린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