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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도서]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은행나무.

* 독서모임 발제문으로 쓴 글이기에 평소와 다릅니다

 1. 서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좋아한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좋다.
  유감스럽게도. 단 한 번도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든지, 피가 끓어올랐다든지, 그런 이벤트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타인에게 책을 권할 때면 매번 망설인다. 이 책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책이 단 한 권도 없기에.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 책도 주저하며 고민하다 결정했다.
 명화에 관한 책이라면, 기분 전환 정도는 되어주지 않을까. 딱 이 정도의 기대였다.


 2. 북유럽 그림에 관하여
 첫 해외여행. 동물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동물원으로 향하던 중, 거대한 미술관을 발견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미술관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자유여행. 특별한 일정도 없었던 만큼 들려도 전혀 상관없음에도 미술관 근처도 가지 않았던 건, 그림을 본들 특별히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청송에 가면 매우 큰 산수화가 전시된 야송 미술관이 있다. 청량대운도라는 이름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청량산을 화폭으로 옮긴 이 작품은, 크기만으로도 압도될 정도.
 하지만 청송하면 내가 떠올리는 건, 야송 미술관이 있는 청송 신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닭불고기다. 독특한 약수로 끓인 닭백숙도 유명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곳에서 딱 하나만 먹는다면 닭불고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어떻게든 딸의 문화력을 높여보고자 하는 부모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청송하면 떠올리는 건 오로지 닭불고기 하나 뿐인 것이다. 이런 내가, 해외까지 나가서 미술관을 간다면 그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그림은 마음에 들었다.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강렬하지는 않다.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그 노력에 압도되지도 않는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처럼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뜨겁지 않다. 타오르지 않는다. 어쩐지 나를 닮은 듯하다.
 북유럽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담담하다. 들라쿠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강렬한 사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을 평온히 보여줄 뿐. 복어와 비슷하다. 강렬한 맛은 없지만, 담백한 맛이 여운을 길게 남긴다.
 인생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그 일상의 대부분은 평범함으로 가득하다. 북유럽 그림이 담담한 건, 어쩌면 우리의 인생사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북유럽 그림에 끌려, 북유럽을 헤매고 또 헤맸던 것이 아닐까.
 
 3. 같이 읽고 싶은 그림에 관하여
 136페이지. 칼 라르손의 그림들. 처음에 이 그림들을 보며 동화책 삽화를 떠올렸다. 원색의 색체. 아기자기한 화풍.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것 같은 그림이었다.
 저자는 이 그림을 보며 정희진 정희진의 이상한 정상 가족은 정상 가족에 얽매여 오히려 다른 형태의 가족을 포용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읽어볼 만하다.
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한다. 한 가족이 제대로 영위되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이 필요하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그 돌봄 노동이 제거되어 있는 이 그림은 어쩐지 공허해 보인다고 했다.

 정희진은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과 깍두기를 먹는 사람이 나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처럼 가족의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이 뒷받침된다는 이야기. 아마 그녀의 주장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칼 라르손이 돌봄 노동을 제거하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칼 라르손에게 돌봄 노동은 ‘희생’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노력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기에, 칼 라르손은 그 노력의 결정체만을 그림에 담은 것일지도 모른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정말로 올리고 싶다면, 돌봄 노동을 ‘희생’으로 정의하는 것부터 우선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돌봄 노동의 주체를 분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 부분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194쪽 페데르 발세의 풍경화를 보며,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떠올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뒷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였다.
 197쪽의 ‘폭풍치는 바다’, 198쪽의 ‘노르웨이 해변의 등대’. 계속되는 바다가, 뜬금없이 인물화를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페데르 발세의 풍경화에서, ‘경외’를 이야기한다. 강렬한 자연이, 인간의 미약함은 강렬하게 방증한다고.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역시 휘몰아치는 바다 앞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결국 앞으로 나가갔다. 페데르 발세의 풍경화도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도 위기 앞에서 오히려 굳건해지는 인간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아까부터 청개구리 독자가 되고 있다. 개굴.


 4. 마무리
 이 책에서 그림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한 수단이다. 124쪽에 나오는 저자와 어머니와의 대화처럼. 이 책의 주제는 그녀의 삶. 인생. 가치관. 그리고 무언가이다.
 그림에 대한 진지한 분석서가 아닌 에세이이기에 읽는 부담을 덜지 않았을까 싶다. 대신 그만큼 강한 개인사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 책을 권한 입장에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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