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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http://m.ch.yes24.com/Article/View/1619
「“선생, 이리 좀 오시오. 내게 그리스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내가 죽거든 편지로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정신이 말짱한 채 그 친구를 생각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나는 뭔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도 전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성사(죽기 전 하는 고해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리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봤지만 아직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 그리스 남자는 알렉시스 조르바라는 사람으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자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영화배우 앤서니 퀸의 팬이라면 한 번쯤 영화로도 만나보았을 법한 그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른바 ‘펜대 운전수’라 불리는 작중 화자(나)가 막노동판 십장쯤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예순 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에서 함께 갈탄광 사업을 벌이다 실패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 쓴 소설입니다. 지식인과 막노동꾼, 젊은 축과 늙은이, 신사와 방탕아라는 완벽한 대립을 이루는 두 사람이 만드는 대화가 이 소설의 핵심 주제면서, ‘나’와 ‘조르바’ 두 사람이 만드는 변증법적 결론의 밑거름입니다.

크레타 출신이지만 한동안 외국을 떠돌며 살아온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무언가 안정적인 수입을 만들 일을 벌이면서 책 읽으며 사는 인생을 꿈꿉니다. 크레타에서 ‘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는 늙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 늙은이는 거칠고 공격적이면서도 매우 선언적인 말투와 친근감으로 ‘나’의 시선을 끕니다.

알렉시스 조르바. 어느 마을에나 처음 가면 과부 있는 집을 찾아가서 잠도 자고 재미도 본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는 조르바는 딱히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운 적도 없고, 남들처럼 책을 읽어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삶을 배운 곳은 바로 삶 그 자체입니다. 어린 나이에 크레타 독립전쟁 의용군으로 뛰며 사람을 죽이고, 잡상인이 되어 여기저기 물건을 팔며 떠돌아다니고, 어지간한 막노동은 안 해본 것이 없는 노동판의 십장인 그는 자신의 삶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를 ‘나’와의 대화 속에 남김없이 흩뿌립니다.

「“확대경으로 물을 보면 벌레가 드글드글하다고 하던데, 당신 같으면 갈증이 날 때 그 벌레를 보겠소? 아니면 외면하고 그냥 벌컥벌컥 물을 마시겠소?”

“인간이란 참 묘한 녀석입니다.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나 웃음,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습니까? 우리 대가리 속에 발성영화기 같은 거라도 들어있나 봅니다.”

“조국이라고? 책에 씌여진 그 엉터리 수작을 당신은 다 믿소? 당신이 믿어야 할 건 나 같은 사람이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내내 거칠고 갈라진 말 속에서 조르바는 인생의 진리를 끌어냅니다. ‘나’와 조르바의 대화는 처음부터 깊고 무거운 인생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저 단순한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는 그러나 조르바의 산 경험에서 우러나는 삶의 지혜를 통해 조금씩 그 무게를 실어가며, 마침내 대화가 끝날 때쯤이면 조르바는 마치 잠언과도 같은 진리를 툭툭 꺼내 던지며 ‘기껏해야 책밖에 더 읽은’ ‘나’를 은근히 타박합니다. 그러나 지식인인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사실 소설의 구성은 위 문단에서 서술한 형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 단조롭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서부터 마지막에 사업을 망치고 헤어질 때까지, 그리고 작중 화자가 편지로 조르바의 죽음을 전해 받을 때까지 크게 다를 바 없이 만나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일하고, 그러다가 조르바의 한 마디에 ‘나’의 감탄이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함을 지루함으로 만들지 않는 공은 첫째로 과감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생과 진리에 대한 조르바의 관념입니다. 그는 비록 유려한 인문人文의 세례를 받지 않아 투박하고 거칠게 표현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물에 대한 분석적 정의와 실용적 가치(물 속의 벌레 이야기)를 선별할 줄 알며, 이른바 문화라고 불리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 결국은 물적 요소에 기반을 두고 있음(발성영화기 이야기)을 역설하고, 내셔널리즘과 같은 집단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억압함(조국 이야기)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 조르바는 관찰자인 ‘나’를 통해서 비로소 독자에게 접근합니다. 삶의 진리를 찾고자 책 속을 후벼 파던 ‘나’는 자신이 찾던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이 조르바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말을 재해석할 여지를 마련합니다. ‘나’는 그러한 궁금증을 늘 가지고 있기에, 조르바가 툭툭 던지는, 자칫 지나치기 쉬운 말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독자와 공유하며, 이는 소설의 동어반복 구조를 매 순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두 번째 요소입니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한 장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글로 번역한 번역가 이윤기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메토이소노聖化’라고 설명합니다. 성화란 종교 개념으로, 쉽게 설명하면 가톨릭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祝聖하여 예수의 살과 피로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문학적 개념 확장을 통해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 변화는 물리적 변화가 아닌 형이상학적 가치 변화를 의미합니다.

조르바는 그 스스로 자신의 거칠었던 60여 년 삶을 메토이소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살인, 전쟁과 같은 추악한 모습부터 먹고살고자 분투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을 지나 웃고 떠들고 마시고 취하고 춤추는 희로애락의 순수양태까지 조르바는 그가 겪은 삶을 삶 그대로 두지 않고 인간 본연의 가치로 메토이소노합니다.

그런 조르바를 다시 메토이소노하는 것이 ‘나’입니다. 조르바의 삶과 말을 ‘나’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 속에서 다시 한 번 메토이소노하며, 두 번의 메토이소노를 거친 조르바의 철학은 독자에게 새로운 사유와 감동의 장을 선사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메토이소노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해석은 바로 이 두 번의 메토이소노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특히 그중 독자에게 조르바를 메토이소노하는 ‘나’의 존재가 소설 전반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나’는 실제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동격으로 보아도 무방한 인물입니다.

실제 저자의 이력은 사뭇 새롭습니다. 터키 지배에 놓여 있던 크레타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맞닿은 전쟁터에서 자란 터라, ‘투쟁’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살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자유를 찾고자 저항하던 크레타인을 보고, 또 그 크레타가 실제로 자유를 맞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는 데 인생을 겁니다. 그는 모국의 고전인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해 베르그송과 니체를 거치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자유의 최종점이 어디인가를 끝없이 고민하며, 그 해답을 찾고자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3 - 1957 )
그러한 카잔차키스의 삶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교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붓다의 설법과 대화에 관한 다양한 인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처음에 만날 수 있는 ‘목자와 붓다의 대화’ 편을 예로 들어 봅니다.

「목자: “나는 양을 모두 우리에 넣었고, 집에는 따뜻한 불을 피웠으며 지붕 아래의 안락한 침대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늘이시여, 이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붓다: “나는 양도 없고 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붓다의 이러한 가르침이 저자 카잔차키스를 매료했고, 그랬기에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조르바의 삶은 어찌 보면 붓다와도 다를 바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그렇기에 그는 막무가내며 아무것도 거치적거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지녔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자유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자유라고 선언하였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는 문학이기에 앞서 카잔차키스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롤 모델을 선언하는 철학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지독한 비하와 편견입니다. 조르바의 삶에서 여성은 주변인이며 대상일 뿐입니다. 소설 전반에 걸친 여성에 대한 비하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매우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르바의 그런 여성 비하를 진정한 자유로 지칭하는 소설의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며, 특히 과거와 달리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문제가 중심 주제가 되는 요즘에는 반드시 접근해 봐야 할 관점의 문제제기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매우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소설 한 권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볼 수 있는 위버멘쉬Ubermensch의 개념과 구분 지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얼마 전에는 ‘한국의 조르바’라 불리는 배추 방동규 선생의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가 출간되었는데, 그의 삶과 조르바의 삶을 비교해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평생 자유를 찾아 헤맨 그리스의 한 작가이자 철학자가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혹은 철학서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한 시대를 살아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비단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뿐만 아니라 그의 비문에서도 얻을 수 있는 감동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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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직원. 그러나 책을 만지기 힘든 부서에서 전화에 시달리며 글을 쓰고 있다. 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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