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는 아직 아스팔트가 뜨겁지만, 하늘만은 오로지 가을이라 이야기하는 듯 맑은 하늘이었다.
오랜만에 갖는 평일 오전의 외출에 마음이 설레이기에도 충분한 날씨였다.
며칠부터 이제는 의심할 나위없는 가을이라 홀로 마음먹기도 했었다.
지하철에 올라서기까지가 열한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지하철은 생각보다 붐비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이 시간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지하철 3호선으로 갈아타자 더욱 많은 사람들로 지하철 안이 꽤나 혼잡해졌다.
속으로는 설마 이 사람들 모두 전시회를 감상하러 가는 것인가? 라는 착각마져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목적지인 남부터미널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예술의 전당은 남부터미널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5번출구를 곧장 나와 첫번째 골목에서 좌회전해서 얼마간 내려가면 길 건너편에 있는 예술의 전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골목은 더욱 한산해서 나를 스쳐간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하도를 지나 예술의 전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르세미술관 전은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난 1층 외부에 위치한 티켓박스에서 표를 사기 위해 다시 나왔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티케팅을 하고 다시 미술관 안으로 향했다.
미술관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산하기만 했다. 나를 뒤이어 3층 전시장으로 오르는 사람이라곤 나를 제외하면 아주머니 2분 뿐이었다.
3층으로 올라서자 곧장 입구가 눈에 띄엿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에 도슨트 교육 시간을 확인했다.
도슨트는 12시에 정각에 있을 예정이었기에 난 혼자서 잠시 미술관 안을 돌아보기로 했다.
미술관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림 앞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몇몇은 바쁜 걸음으로, 몇몇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마치 예전 시골집 앞 개울물을 쳐다볼 때,
갚은 개울이라도 잔잔한 물살과 빠른 물살이 길을 내며 흘러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난 그림을 쫓는 발걸음의 무리에서 한 발자국 뒤쳐져 걷기로 했다.
나를 처음 맞이해준 작품은 한스 토마의 "낮잠"(1889년, 캔버스/유채) 이었다.
순간 우연처럼 이어폰으로 듣던 라디오에서는 영화 디어헌터의 OST '카바티나'가 흘러나왔다.
그림 속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낮 봄의 따뜻함을 즐기는 소년에게 들려주기 위한 자장가라도 되는 듯,
혹은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듯 그렇게 생각지도 않은 배경음악은 그림과 썩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다음으로 눈길이 간 그림은 알렉상드르 카바델의 "비너스의 탄생"(1863년, 캔버스/유채)였다.
한참 동안 그림을 지켜보면서 시선이 간 것은 파도의 거품위에 누워있는 비너스이 눈길이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은 이제막 태어난 아이가 눈이 부시듯이 그녀 역시 햇살에 눈이 부시었던 탓일까?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아기천사들의 눈빛 조차 심상치 않은 듯했다. 그들의 눈빛은 천사의 눈빛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세상 삶을 지독하게 살아본 그런 사람의 고혹적인 눈빛이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림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회화는 시각의 예술인데, 왜 인지 그림에서는 시각을 넘어서는 촉각마져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지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도슨트 시간이 되었다.
꽤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붐비는 틈의 일원이 되어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을 아우르는 인상파,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해 나갔다.
"비너스의 탄생"은 알렉상드르 카바델의 역작으로,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 그림을 샀다고 한다. 그리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 그림은 이 전시관을 찾는 남성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라고 도슨트가 설명할 만큼, 관능미가 넘치는 그림이라고 한다.
종래의 비너스 그림들이 기립해 있는 자세임에 비해 이 그림에서 비너스는 파도 위에 요염한 자태로 누워있을 뿐 아니라, 비너스를 비롯해 주위의 에로스들의 눈빛은 마치 유혹하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림을 보고 느낀 무언가 모호한 그런 느낌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던 가 보다.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하는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아서는 다음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에 든다."
"아름답다."
"멋있다."
아마도, 내가 받은 이런 느낌을 나폴레옹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나폴레옹과 내가 수백년의 시간과 수천킬로미터의 공간을 넘어서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었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상상 속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느낀 세세한 감정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 내면에 있는 상세한 비밀의 감정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으리라.
다음 그림은 앙리 팡탱 라투르의 "밤"(1897년, 캔버스/유채) 이었다.
사물은 적당히 가리워 졌을 때,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잘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같은 이치로 많은 화가들에게 밤은 그림을 위한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마치 짙은 밤안개에 쌓인 듯한 이 그림에 가던 발길이 멈추어 지는 것은 그 짙은 명암 뒤에 무언가가 있길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밤"을 지나치고 있을 땐, 벽면 전체가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조르주 로슈그로스의 "꽃밭의 기사"(1892년, 캔버스/유채)가 그 정체였다.
그림 속에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꽃과 꽃의 요정들 보다 더욱 빛나는 기사의 광휘가 멋지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그림은 '악을 상대로 승리한 선'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승리의 순간에 대한 정말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렇게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찬란한 영광의 그림을 지나치고 있는 나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린듯 천진해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앙리 루소의 "전쟁, 불화의 기마상"(1894년경, 캔버스/유채) 였다.
전직 세관원이었던 앙리 루소는 주말의 화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평일에는 공무원으로서 생활하는 그에게는 적절한 별명이라고 하겠다.
그런 그는 정규 화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살아 생전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그도 그런 것이 그림 속의 구도나 묘사는 천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여인(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소녀에 가까운)은 말 안장에 걸터 앉거나 해야 할 것이지만, 그녀는 말과 나란히 달리는 듯한 모습이었고, 칼을 쥐고 있어야 할 그녀의 손가락역시 칼자루와는 따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그림은 훗날 피카소가 극찬함으로서 재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회괴한 명작을 지나치자 또 다시 눈부신 하얀 빛이 나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캄캄한 밤 홀로 돌아와 문득 방문을 열어 젖히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사실은 혼자 살게 된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이런 무의미한 깨달음과 잊음을 반복하고있다.
그럴때 불을 켜고 무심코 천장을 바라보았을 때,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불빛,,,
그림 속의 하얀 빛은 마치 그런 불빛과 유사했다.
미술관을 내내 돌아보는 나의 눈은 자연조명이 없는 미술관 복도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눈을 자극해 준 빛의 그림은 필립 윌슨 스티어의 "해변의 젊은 여인"(1888년경,캔버스/유채)이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그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 틈에서 유난히 빛나는 그 그림은 아이러니 하게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상주의 화풍과도 거리가 멀다고 평가 받고 있는 이 그림은 역광을 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과 아주 커다랗게 그려진 그녀의 그림자(화려한 빛에 가려져 이 커다란 그림자를 찾는데 한참이나 걸렸었다.)를 통해 시적인 낭만주의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시적인 낭만 때문일까? 이 작품 앞에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음으로 나를 맞이해준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봄"(1868~1873년, 캔버스/유채) 였다.
오르세미술관을 찾은 사람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을 물으면 다음처럼 대답한다고 한다.
"무지개 그림이 가장 인상깊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봄"의 왼쪽 위에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색채를 띠고 있는 쌍 무지개가 걸려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을 무지개 그림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심하군 이라고 생각하며 그림 감상을 계속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라고 하면, "만종" 과 같은 정적이고 고요한 그림을 떠올리곤 했는데, 이 "봄"은 정말 화려함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봄과 가을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소나기가 내린 뒤 생생하게 발동하는 봄의 생기로움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밀레의 "봄"은 그 화려함으로 이 전시회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다음 그림 보다도 더 많은 관람객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화려한 "봄" 으로 인해 약간은 소외 받아 버린 우리의 주인공이 다음 그림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1888~1889년, 캔버스/유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화가라 불리며 자연의 빛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자연을 미묘한 붓터치와 같은 기술이 뛰어난 것보다도, 그러한 자연의 빛을 따라가면서 재창조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림 속에 빛나는 별들에서는 이 세상의 별과는 다른 그 어떤 느낌을 뿌옇고 노란 불빛과 함께 뿜어 내고 있는 듯했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특별한 의미의 공간이라고 한다. 그가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그린 것도 이 "아를"이고, 그가 귀를 잘라 낸 것 또한 바로 이 "아를"에서 였다고 한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지. 욱신거리는 오른 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려오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 반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중에서 -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아련하게 꾸는 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어느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꾼 꿈 속의 예언을 기억해 내기 위해 수없이 꿈을 되뇌이지만, 꿈은 요원하기만 할뿐 손에 잡힐 듯 빠져나가 버리는 모래 처럼 그의 마음을 때론 달래주고, 때론 괴롭히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 밑으로는 막 산업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거리를 비추고 있는 네온 사인이 탁한 노오란 빛깔을 내뿜고 있고, 그러한 네온사인은 별빛을 반사하고 있던 강위에 비추며 별빛의 자취 조차 지워 버렸다. 그러한 거리의 광경에는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는 듯한 두 젊은 남녀가 술에 취한 채 거리로부터 등을 돌린채 멀어지고 있다.
그림 속의 밤하늘은 결코 칠흙같은 어둠은 아니다. 칠흙같은 어둠은 오히려 요즘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시네도키 뉴욕이란 영화에서는 시각도 결국은 뇌가 보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고흐 역시 빛의 화가로서 그가 보는 빛을 재창조해 내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가 눈으로 본 것은 결국 그의 뇌가 본 것은 아닐까? 그의 머릿 속의 생각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그림을 보고 있는 나의 시각 뒤에 있는 나의 뇌에 질문해 보았다.
그렇게 밤을 뒤로 할 즈음, 다시 나의 발길을 잡아 끌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밤을 뒤로 하고 밝게 빛나며 나의 시선을 이끌었다.
윈슬러 호머의 "여름 밤"(1890년, 캔버스/유채)가 바로 그 그림이다.
그렇게 멀리서 빛에 이끌린 나방처럼 자연스럽게 이끌려 가서 바라본 그림의 중앙에는 춤추는 여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녀들 뒤로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 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림을 지배하는 것은 밝은 빛이었지만, 그런 빛은 주위의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뒷모습 뿐이지만, 때론 강렬한 빛과 자극적인 감각이 먼저 눈에 띄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는 관찰 가능한 장면을 그리는 대신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자연의 힘을 표현했다고 하니, 아마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막 돌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시선이 간 그림은
클로드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1879년, 캔버스/유채) 이었다.
1870년에 클로드 모네와 결혼한 카미유 동시유는 젊은 시절, 그림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서른 두살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나의 불쌍한 아내가 끔찍한 고통을 받다가 오늘 아침에 사망했습니다... 중략 ...
이 편지에 차용증서를 동봉하니, 제가 전당포에 맡겨 놓은 펜던트 목걸이를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중략...
그녀가 떠나기 전에 꼭 그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고 싶습니다."
- 다니엘 빌덴스타인 "클로드 모네, 전기 및 카탈로그 레조네, 그의 작품들" 1권, 로잔 파리 출판사 -
이윽고 쳐다 본 시계는 13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단체 관람을 온 아이들로 미술관안은 시끌벅적하게 변해있었다. 마치 주말 저녁 강남역 주변의 스타벅스 안 처럼 시끌시끌 한 통에 그림에 집중할 수 없게 된 나는 아이들이 제각각 손에 들고 있는 종이 위로 눈길을 주었다.
"도대체 무엇을 적으란 건지 모르겠네."
"야 이 그림 적자. 이 그림 책에서 보았어."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 위에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흐 같은 대표적인 화가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각 작품들 사이에는 4~5cm 의 공간이 있어 아이들이 무언가 적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멈추어 서서 적는 아이들은 없었다. 대개의 아이들은 학원을 마치고 올라탄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서지 않고 가길 기다리는 그런 마음인양 그림들을 스쳐지나갔고, 그들이 멈추어서는 그림은 고작 해야 두 서너 점, 대개가 많이 알려진 그림들 뿐이었다.
난 이제까지 그림이란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이해하는 것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림은 그냥 그림일 뿐, 발길을 멈추어 시선을 던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명화 일 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말하는
"아름답다"
과연 그럴까? 그것으로 충분할까? 고흐는 살아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 였다. 그의 그림은 그가 살아 생전에 단 한 작품만이 팔렸을 뿐이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엄청난 고액으로 팔렸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라고 말한다면 합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그림에 대한 조류의 변화, 혹은 후대의 재평가로 인해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 후 주목받게 된 그의 구구절절한 생애 때문일까?
지금 우리들이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가치 안에서 과연 그는 무덤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정해진 감상법에 따라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이들은 종이에 적을 것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너스의 탄생 앞에서 내가 미쳐 무언가를 느낄 만큼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도슨트가 와서 이야기 하면, 난 당당히 고개는 끄덕일 수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얻은 것을 내가 느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몰랐을 때보다 더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술관을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