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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도서]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저/최혁순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는 독일의 석학 에리히 프롬에 의해 쓰여졌으며, 그가 사망하기 4년 전인 1976년에 출간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눈 뒤, 우리의 사회는 존재양식을 근거로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로 변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존재양식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각각의 양식에 대해 설명하고, 존재양식으로 돌아가기 위한 제언으로 끝을 맺는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양식이 변화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책의 내용 중에서 인간의 성격의 변화 혹은 사회의 변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변화 혹은 책의 서술방식과도 닮은 점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성격이 변혁될 수 있다고 본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다.

2)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우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4)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활규범을 따라야 하며, 현재의 생활관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P224-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위대한 약속, 그 좌절과 새로운 대안

2.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개관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구약·신약성서 및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작

3. 두 가지 생존양식의 기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소요양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소유와 존재의 새로운 측면

4.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종교·성격·사회

인간변혁의 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색

새로운 사회의 특색

에리히 프롬은 존재양식에서 출발한 현대의 사회가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로 변모되었음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설명의 과정에서 여러가지 비유와 인용, 그리고, 그가 교사라고 이야기하는 여러 석학, 예를 들어,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에리히 프롬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라는 하나의 스펙트럼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실들 혹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 함으로써, 단순한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 대한 소개의 글 이상의 의미를 던지고 있다.

 

'나는 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사람이 그 주체가 되는 내적 능동성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45-

 

명사는 이와 같이 존재양식에서 소유양식으로 변화되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언어 습관에서도 이러한 변화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표현할 때, 그 변화나 행동의 양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그것을 대상화하여, ~가진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법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최적의 지식은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P69-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는 무수한 대척점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지식과 기술 마져 소유화해 버렸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지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세상은 유한한하다. 그 무엇도 무한할 수 없다. 하지만, 소유에 대한 욕구는 무한한 것이다. 따라서, 유한한 것에 대한 무한한 소유는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서구인들이 선과 같은 동양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이 재산과 탐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 사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P41-

 

우리는 지금까지도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에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만, 그것은 더이상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에는, 서구적인 것은 현대적인 것을 대변하고 동양적인 것은 과거를 대변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더불어, 최근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행을 여가를 즐기는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여행이 가지는 본래적 기능과 장점은 퇴색하여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이상 서울 거리와 도쿄 거리 또는 타국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 무엇이 아닌 여행이란 경험을 소유하기 위해서 떠난다.

 

이 모든 것은 문제가 인식되고 있어 해결을 위해 무엇이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P30-

 

선견지명인 것일까 아니면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변화의 속도를 강조하는 지금의 세상은 모든 것에 해마다 다른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한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나오는 것이고, 미디어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이름을 모아 이야기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란 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 현대인의 시간은 역사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그런데, 만약 지금과 같이 해마다 모든 것의 명칭이 변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100년 뒤에는 오히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현대인이 소유했던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온갖 것으로 가득하던 현대에는 오히려 텅 빈 시간만이 남을 가능성이 있다.

 

사회가 멈포드가 명명한 것처럼 '거대한 기계'로 변모된다면 결국은 파시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첫째 사람들은 순한 양이되고,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무력감을 갖게 되고, 수동적이 되고, 필연적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 그리고 그 밖에 '그들'이 모르는 모든 것을 - '알고' 있는 지도자를 동경하게 되며, 둘째 이 '거대한 기계'는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저 필요한 단추만 누르면 작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P243-

 

마지막으로 에리히 프롬은 존재양식의 사회로 지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면면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40여년 전이라고 하나, 마치 오늘자 신문 논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윗 문단을 보아도 그렇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빗댄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글을 마치면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어도 실천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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