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는 Neil Marcus의 「Disabled Country」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펼쳐진다. 우리말로 옮기면 「장애라는 나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In my life's journey
I am making myself
At home in my country.
내 인생의 여정에서
나는 내 집으로 삼으려 하고 있어
내 나라를.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장애라는 나라」가 단순히 장애인의 정체성을 소재로 삼은 시인가보다 싶었는데, 책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그것은 나의, 우리의, 당신의 집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애의 역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선주민(*인디언)이 주로 살던 때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역사를 장애(disability)에 초점을 두어 서술한다. 기존의 정치·사회·문화적 서술과는 달라서 미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집중하며 읽을 수 있다.
북미 선주민(토착민)들에게는 유럽인들이 세운 장애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자연에서 살아가며 신체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빈번하게 존재했지만 그들 모두가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예컨대 나바호족 토착민은 신체적, 인지적 결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공동체의 호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면 낙인 없이 잘 살 수 있었다. 태생적 장애의 원인에 대해서는 부모가 금기를 위반하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금기로 여겨지는 행동이나 장소를 매번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낙인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북미로 이주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면서부터 장애와 관련한 사회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전염병과 멸시를 가져왔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왔으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나라를 세웠다. (청교도적 가치관과 민주주의 위에 미합중국을 세웠다고는 하나, 적어도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더 세다.) 돈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인종과 젠더에 따라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 과정에서 장애는 ‘노동능력의 부재’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미국 초기에 참정권을 가진 시민과 ‘참정권을 가질 자격이 없는’ 존재를 나누면서 빈자, 유색인종, 여성은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었다. 정치에 참여하기엔 부족한, 달리 말하자면 장애를 가진 것으로 취급된 것이다.
103쪽
노예제의 근간을 이루는 인종차별 이념에 따르면, 북아메리카로 온 아프리카인은 그 자체로 장애인이었다. 노예 소유자들과 노예제 옹호자들은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정신적·신체적으로 열등하게 태어났고 그들의 몸이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럽다고 가정했다.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여성 참정권 문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고통당한 노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내 주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없어서 피부로 와닿지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 차별의 근원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는 장애가 없고 너는 장애가 있으니까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 라는 논지의 비장애중심주의는 미국사회의 전면에 스며들어서 교묘하게 차별을 더욱 조장했다. 그 편견 어린 시선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많은 발전을 일구어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서 기독교가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가 저토록 장애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에 대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늘날에도 종교라는 미명 하에 포용이 아니라 배제를 정당화하는 미국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구어주의자들 때문에 수어를 금지당하고 오히려 더 낙인 찍인 농인들의 사례와 「Oralist(구어주의자)」라는 시를 읽으며 그 기분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190쪽 (시의 일부만 발췌, Google Scholar에 검색하면 원문을 볼 수 있다)
구어주의자여, 너의 고개를 돌려라, 당신 같은 이들의 죄를 위해 죽어간 가엾은 예수를 알고 있는가
Oralist, O oralist, turn your head aside, Know you not the pitying Christ for sins like yours has died?
『장애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점은 “장애 개념이 시대의 이념에 따라 변화한다” 라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당연시했던 수용소와 단종수술 등이 폭력임을 깨닫고 장애인을 연민과 혐오로만 대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라는 나라’는 ‘우리 모두의 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분명 우리나라도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이식 받으면서 장애에 대한 편견도 함께 수입했을 것이다. 내 나라를 장애라는 렌즈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아직은 나도 비장애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공동체를 위해 계속해서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