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전문, 김종삼
시에 대한 열정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 소진한 시인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이다.
이 시를 신경림시인의 해설로 들으면 그 시대적 상황과 배경, 그리고 시인의 내면까지 엿볼 수 있어
잔잔한 감동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잠시 신경림시인의 해설을 들어보자.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겠지. 그 속을 외투깃을 세우고 허리를 구부정하니 걸어가는 김종삼 시인이 생각난다. 잡도속을 크리스마스 캐럴 [북치는 소년]이 울려 퍼지고 진열창 안에서는 환상적인 북국의 설경을 그린, 또는 눈이 큰 이국의 소녀가 진눈깨비 속에서 양떼를 몰고 가는 그림을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가 아이들을 유혹하리라. 저 카드들이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아무 은혜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좋으련만, 어쩌면 시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시를 썼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가장 충격을 주는 대목은 첫 연이다. 실제로 이 시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내용이 없는 데서 오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김종삼 시의 마력의 비밀이다. 김종삼 시가 내용을 가지려 했다면 그 마력은 반감되지 않았을까. 그의 무덤 앞에서 동행한 미망인 정귀례 여사로부터 내용 없었던 시인의 삶의 얘기를 들으니, [북치는 소년]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열고 있는 까닭이 이해되면서, 비로소 김종삼 시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느낌이다." (61쪽)
나는 김종삼 시인을 잘 알지 못한다.
우연히, 그러니까 한참 문학모임을 열심히 하던 시절, 문집을 만들려고 글을 부탁했던
한 시인 지망생에게서 처음으로 저 시를 소개받았다. 50년대의 가난한 시대를 살면서 민중들의
애환을 지나치기 어려웠던 시인의 내면을 [북치는 소년]을 통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신동엽
"이 시 역시 검열자의 눈으로 보면 불온하기 짝이 없다. 당시 체제가 금기시하던 분단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있고 외세에 대한 반대가 있기 때문이다. 반전적인 정서와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찬미 같은
것도 체제쪽에서 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보다도 "껍데기는 가라"는 화두 자체가 못마땅
했을 터이다. 콤플렉스가 심한 그들(그들이야 말로 껍데기가 아니고 무엇인가)은 이 말이야말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터이다." (81쪽)
나는 이 시를 읽고 시인의 메세지(반외세, 반전, 통일염원)는 잊어버린 채 오직 내 입장만을
생각하며, 빨리 알속의 껍질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인생을 펼칠 수 있는 새 삶의 방향성만을
음미했다. 끝없이 조국을 사랑했고 가난한 시대를 보듬으며 진정한 백성의 세상을 열어젖히고픈
그의 혁명적 삶은 잊은 채 시의 의미를 개인적 삶의 방향성으로 돌리려 했던 것은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나)의 잘못일까?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雜誌의 표지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마와 숙녀] 전문, 박인환
"이 시에서 메시지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이 시에 담긴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으면 된다. 세 번씩이나 나오는 버지니아 울프([등대에 To the Lighthouse]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등대로'가 옳은 역어이다) 에 대해서 약간의 예비지식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1882~1941)에 걸쳐 살았던 영국의 여류소설가, 소위 빅토리아 시대의 지적 귀족을 대표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에 나오는 [등대로]는 페미니즘 소설의 효시로 일컬어지며 그 밖에 [파도], [댈러웨이 부인] 등의 대표작이 있다.
내면의 묘사와 시적인 문체로 특징지워지는 그녀의 소설은 조금은 귀족적이고 또 조금은 탈속적(脫俗的) 이었다. 또한 감정의 명암에 대한 미묘하고 정확한 감각을 지닌 문장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분위기는 늘 어두었다. 삶의 고독과 남과 함께할 수 없는 오뇌, 이것이 그녀의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아마 이런 요소들이 박인환 시인을 사로잡았으리라." (228, 229쪽)
7,80년대 심야 라디오 프로를 들으면 자주 나오는, 가수 박인희가 애수(哀愁)띤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사실 박인환의 시(詩)였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나는 알았다. 그리곤 박인희가 부른 노래
테이프를 사서 저녁마다, 또는 마음이 울적할 때, 술 한잔 하면서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알고 싶어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했고 그녀의 평전을
읽었으며 그녀의 단편소설집까지 사서 읽었다. 지금은 다 까마득하지만... 박인환 시인은 김수영
시인과는 일종의 라이벌처럼 지냈다. 문학에 대한 설전이 오갔으며 서로의 약점을 들추어내며
술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결벽증과 자존심이 강했던 시인들의 내면은 술로써 폭발하며 문학
조류의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시 비평
집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밖에도 이 책에서는 이런 시인들을 소개한다.
[향수]의 정지용, [지조론]의 조지훈, 목가적인 참여시인 신석정, 눈물과 결곡의 박용래,
조국을 사랑한 박봉우, 이데올로기에 침몰한 혁명시인 임화, 헐벗은 아이들과 함께 한 권태응,
[광야]의 이육사, 낭만과 격정를 노래한 오장환, 쓸쓸함과 애달픔의 김영랑, 우수의 시인 이한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 민족과 구원을 노래한 한용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
삶을 관통한 시인 신동문, 남성적 그리움의 유치환, 자연의 시인 박목월, 살아있는 정신의 소유자
김수영, 순진무구한 천상병...
어느 시인의 얘기를 들어도 가슴 짠한 아픔과 시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시인의 시(詩)와 해설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시를 위주로 쓴 것이다.
어느 한 분도 빼 버릴 수 없는, 위대한 시인들과 함께 하는, 의미있고 함축적인,
그리고 [농무]를 지은, 존경하는 신경림 시인만의 해설이 돋보이는, 시를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국토 유람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