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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도서] 페퍼민트

백온유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생애 주기 속에서 길든 짧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통과하게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병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전력으로 회피한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다가 어느 날 예고 없이 그날이 도래하면 신발을 뺏긴 채로 한 겨울 거리에 내몰린 아이처럼 아연해져 떨게 될 것이다. 한발 앞서 미리 상상할 수 없을까. 상상으로 면역력을 기를 수는 없을까. 조금 더 의연할 수 있도록.

...

감염병을 겪으며 사람들은 우리 안에 도사리는 무수한 두려움을 공유했고,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은 회복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 마음을 한 번 더 믿어 보고 싶다. 우리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불안을 나눈다면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면서 일상을 지속하는 삶과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페퍼민트> 작가의 말, 266~267쪽

 

기약 없는 기다림과 매일을 싸우고 있을 간병인들의 삶에 들어가 볼 수 있는, 따라서 그들의 삶과 그들이 느낄 감정들을 고스란히 이해해 볼 수 있는 소설, <페퍼민트>. '간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보통의 우리들은 쉽게 겁에 질리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삶의 순간에 갑작스레 다가오는 간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길, 비록 그 기간이 길지 않더라도 간병인으로서 보내는 시간들로 인해 좌절하지 않길 바라는 백온유 작가님의 마음에서 탄생하게 된 소설, <페퍼민트>.

 

'도대체 해원(지원)과 시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의문은 이 소설의 중반부에까지 이어진다. 중후반부에 가서야 둘 사이 있었던 일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시안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범하게만 살게 해주세요'라 소원을 비는 이들이 있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꽤나 어려운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글이 떠오른다. 독자들은 <페퍼민트>를 읽으며 평범함의 가치에 대해서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가족을 간병하는 시간도 노동 시간으로 인정되어 나는 최저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5일, 하루 최대 7시간까지만 인정되지만 그래도 내겐 큰돈이었다. 아빠는 내가 간병을 해서 받은 돈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그 돈을 모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차를 사거나, 멀리 여행을 가거나, 유학을 가라고 했다.

<페퍼민트>, 63쪽

 

간병인 생활은 시안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시안은 기약 없는 기다림, 오랜 간병인 생활, 그럼에도 성과 없는 결과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너 학원 어디 다닌다고 했지?"

"우리 학교 근처. 근데 왜?"

"거기 EBS 강사 출강하는 곳 맞지? 수업 끝나면 너희 학원 앞으로 갈게. 아이스크림 먹자."

"오늘은 안 돼. 학원 늦게 끝나."

"저번에도 바쁘다더니. 왜 넌 맨날......"

...

내가 깜빡 존 사이에 엄마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마음을 넌 모르겠지. 해원의 빡빡한 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낙오되어 있는지 실감했다. 보통 사람들의 진도를 죽을 때까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 미래에 실망하게 되었다.

<페퍼민트>, 71쪽

 

시안은 '그 사건' 이후에 해원을, 해원의 오빠 해일을 처음 만났다. 쫓겨나듯 도시를, 집을 떠났던 해원 가족을 대하는 시안의 태도와 감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황이 바뀜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는지 찾아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이다. 시안을 둘러싼 환경에 온전히 집중해 상상해 본다면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생각에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노력과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이 365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20대의 이시안과 30대의 이시안, 40대의 이시안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소변 통을 비우는 모습을 내가 상상하고 만다는 거야."

<페퍼민트>, 76쪽 & 211쪽

 

처음에는 조그마한 변화에도 희망을 느낀 시안. 몇 달 정도만 참으면 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사의 단호하고 차가운 진단, 의학 서적에 적힌 선례들, 그리고 원칙들. 이 모든 것의 예상을 깨고 마치 이들을 비웃듯 어느 날 기적처럼 회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안은 처음엔 이 기적이 자신의 가족에도 찾아오길 바랐을 것이다. 기약 없는 하루 하루를 이 희망 하나로 버텼을 것이다.

 

해원과의 시간은 편안하고 즐거웠을 뿐 아니라, 강렬했다. 나는 집에 와서도 생생하게 그날을 곱씹었다. 해원과 신촌에서 놀던 시간들이 자꾸 떠올랐다. 떠올리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

다음에는 해방촌에 가자고 했던가. 나는 틈이 날 때마다 해방촌 맛집을 검색하다가도 이런 내 모습에 소름이 돋아서 괜히 해원의 연락을 무시했다. 그게 내가 나를 벌주는 방법이었다.

<페퍼민트>, 110~111쪽

 

친한 친구와 VR 게임방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기. 딸기 탕후루를 물고선 서로의 표정에 깔깔대기. 발이 닿는대로 거리의 옷 가게로 들어가 이 옷 저 옷 걸쳐 보며 또 하나의 추억을 쌓기. 이 모든 것은 여느 평범한 학생들게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같은 학교, 같은 도시, 같은 나라의 수많은 경쟁자들과 매일을 싸우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마음 맞는 친구와의 소소한 일탈일 것이다. 시안이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가능했다면 친한 친구들과 방과후에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곳에 놀러가며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시안은 평범함을 박탈당한 채 병원으로, 학교로, 사회로 내던저져야 했다.

 

"일이 있었다며. 아빠가 그날 저녁에 와 줄 수 있냐고 전화를 하셨는데 나도 사정이 있어서 나올 수가 없었어. 마음이 편치 않더라."

"그냥, 그날은 일이 좀 있었어요."

...

약간은 거칠고 강한 인상과는 달리 선생님은 섬세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최선희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가끔, 서운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절대로 시간외 근무를 하지 않는 것,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것. 이건 선생님이 세운 규칙인 듯했고 예외는 없었다.

<페퍼민트>, 111쪽

 

최근 들어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전문 간병인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급증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 종종 등장하는 최선희 선생님을 떠올리며 가족이나 지인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간병인의 입장을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간병인 업무를 보다 보면 환자의 보호자보다도 환자에게서 더 많은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세심한 관찰력을 지닌 간병인이라면 보호자가 발견하지 못한 조그만 부분까지도 캐치해 낼 것이다. 자신의 노력 덕분에 환자의 상태가 차츰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할 것이고 감사할 것이다. 자신의 손을 거쳐간 환자들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때로는 빛을 발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약간은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마음씨가 따뜻한 최선희 선생님도 긴 시간 동안 시안의 엄마를 돌보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을 것이다.

 

시안과 같은 보호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할 수 있으나 책임감과 사명감이 요구되는 전문 간병인에게도 분명히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또한, 누구나 그렇듯 최선희 선생님도 가정이 있고 나름의 삶이 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 외에 추가 근무를 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의지는 곧 그녀가 맡은 일을 최대한 잘 해내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추측한다. 간병인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맡은 임무를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휴식은 어느 직업인에게나 필요한 것이나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전문 간병인에게도 일정 시간의 휴식이 더욱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문득 VR룸에서 총으로 좀비를 쏴 죽이던 기억이 났다. 언제든 누군가를 쏘고도 남을 만한 분노가 내게 장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해원을 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정신은 또렷했다. 어느 정도 충동적이긴 했지만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다. 해원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회자되는 것. 사람들의 경멸을 견디는 것. 나는 그걸 잘 알았다.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찾은 느낌이었다.

<페퍼민트>, 162~163쪽

 

시온의 분노는 해원을 향했다. 해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냈고 그 약점을 이용해 해원을 철저히 괴롭힐 생각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괴로운 시간을 여전히 보내고 있는 사람은 시온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해원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해원도 그에 대응하는 삶을 살길 바라는 시온. 해원에게 지난 날의 시간들은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인터넷 악플 세례를 받으며 해원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정신 상태는 개선되었고 일말의 두려움을 털어내기 위해 김해원이 아닌 김지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시온을 만나고 조금은 두려웠지만 어린 시절 워낙 친했던 사이였기에 시온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던 해원. 해원은 갑작스레 공격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시온이 무서웠지만 시온이 보여준 그녀의 삶의 실상을 보고는 만감이 교차한다. 시온을 더이상 보기 싫었던 마음은 이내 죄책감으로 뒤덮였다.

결정적으로 후반부에 해원 덕분에 시온의 가족은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해원은 시온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시온은 그런 그녀를 용서했으며 그렇게 둘은 화해하게 된다. 시온은 해원의 안전한 일상과 미래를 위해 해원과 거리를 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소설은 마무리된다.

 

 


하루 아침에 평범함을 박탈 당한 어린 학생이 마주한 세상이 어떠한지 여실히 드러나 있는 소설, <페퍼민트>. '간병'은 바쁜 현대인들이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또는 간병 생활을 경험해 본 주변 사람들이 없다면 잊기 쉬운, 떠올리기 힘든 소재이다. 간병인 생활과 관련해 여러 차례, 이곳 저곳을 취재를 하며 노력한 끝에 더욱 실감 나게 소설을 다듬음으로써 독자들이 '간병'과 관련된 여러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만들어주시고 간병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신 백온유 작가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이 리뷰는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페퍼민트 #백온유 #백온유장편소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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