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정말 브랜드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남이 아니라)의 기호를 정확히 깨닫고 정작 필요한 아이템만 소비하면서 산다면 브랜드란 건 일찍부터 사라졌을 겁니다. 진실이 중요하고 나 자신의 만족과 행복이 중요하지 브랜드 따위가 다 뭐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 아니 절대 다수의 경제 활동 인구라면 브랜드 같은 것에 실제 효용 이상의 가치를 투영하고 삽니다.
브랜드로부터 "과장 혹은 압축된" 정보를 얻고 살며, 최소한 이 브랜드로부터 상당수의 집단, 그룹이 이런 만족을 끌어내고 일정 공감대를 이루는구나 하는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명품이면 다인 줄 아는 실업자 멍청이가 되라는 게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브랜드는 소비와 문화 영역에서 강렬한 표지, 텍스트, 기호 구실을 하며, 때로는 매우 경제적인 가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 타인들에게 어필하려면 브랜드들의 효과적인 착용과 교체만큼 강렬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 또 없겠습니다. 비록 그 브랜드야 나한테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건 말건 무관하게 말입니다. 본디 보답 없는 짝사랑이란 참 서글프게 마련인데, 여튼 세상 사는 룰이 그리 짜여져 있으니 달리 방법도 없습니다.
한편으로, 세상 사는 룰이 어차피 그리 짜여져 있다면 수동적으로 그저 최소한의 남들 할 만큼만 하고 말 게 아니라, 혹은 그저 시장과 브랜드의 지시와 강권에 길들게 아니라, 브랜드의 생리와 작동 원리에 대해 그 나름 깊이 있게 관찰, 성찰, 통찰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작게는 나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크게는 내 조직, 내 회사(우리는 누구든 간에, 작든 크든 어디에든 속해 있기 마련이죠)에서 생산해 내는 상품과 서비스의 어필을 위해, 지금 이 사회에서, 브랜드가 어떤 식으로 태어나고 크고, 외면당하거나 혹은 잘나가고, 마침내 세상의 상징 중 하나로 우뚝 서거나 조용히 퇴장하는지를 관찰하는 건 곧 세상 작동 원리의 축소판 공부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나가는 브랜드 마케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건 무척이나 뜻깊은 일입니다.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지만 우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게 체질입니다." 이 말은 배달의민족 대표 김봉진 씨가 새로운 비전과 프로젝트를 선포할 때(p140) 특히 세 가지 강조 사항을 전달 받은 해당 회사 마케터들의 고백입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음식을 많이 만들어 볼 것
둘째 음식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눌 것
셋째 관련 서적이나 영화를 많이 볼 것
물론 해당 회사(어느 회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의 마케터들에게 이런 지시를 할 단계라면 대표인 자신은 몇 배, 아니 몇 천 배는 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내린 결론, 확신이 그 동기로 자리잡은 후이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저런 회사를 보며, 더 갈등하고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조직이 그저 한번 만들어 놓은 시스템, 혹은 타성에 젖어 직원들만 굴리고 쥐어짜내는 구태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려는 걸 보고 아직도 저런 이들이 있으니 과연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 건지 회의가 들 때가 많았습니다.
배민은 빙금 제가 예로 든 저 업종과 전혀 무관한데, 오히려 여기는 한번 잘 깔아놓은 플랫폼으로 평생 자릿세만 받아먹으면 그만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책의 이 구절을 보고 정신이 버쩍 나는 것 같더군요. 사실 저는 배달통이 갠적으로 더 편해서 거길 주로 이용하는데(ㅋㅋ 죄송합니다), 이런 곳은 B와 C를 연결해 주는 미디어에 불과하지 본인들이 직접 뭘 생산하는 업체가 아닌데도 CEO가 이런 고민까지 하며, 동시에 마케터들이 그런 대표의 고민을 이식, 공감, 복제, 확장까지 해서 최상의 브랜딩을 이뤄내야 하는 그 조직의 구조, 체질에 감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십 년 전에 모 백화점(식품 회사가 아니라)에서 자사 푸드코트를 더 잘 꾸미기 위해 재래시장까지 찾아와 맛과 레시피에 대한 조언, 체험을 거쳤다는 에피소드도 들었으나, 지금 이 경우는 그것보다 몇 십 배는 더한 거죠. 요즘 뭐 남들 하는 대로 시늉만 내어서야 일이 어디 되겠습니까. 몇 푼 안 되는 시청료나 횡령할 궁리만 머리 속에 가득한, 늙고 한심한 밑바닥 체질 도둑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범죄가 체질이니 수감 생활도 체질이겠죠?). 여튼 배민 같은 중개 앱 역시, 맛과 풍미와 미학에 독자 철학을 확립해야 소비자들 사이에 적실한 이미지를 심고 오래 살아남는다는, 이런 진리, 이치가 어느 업종이라고 통하지 않으라는 법이 또 없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이 격언이 우리 동아시아, 즉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뜻하는 바와, 저 구미에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고 들은 적 있습니다. 우리는 이끼를 긍정적인 뜻으로 보아, 한 곳에서 진득히 자리를 지키는 인재라야 대성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새기지만, 저쪽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곳에만 집착하는 인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근데 사실 저는 요즘 들어 두 가지 방향 모두에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 조직에서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며, 프로 스포츠에서도 프랜차이즈 스타로 팀을 안 옮기고 오래 사랑받는 건 당연히 레전드로 대접 받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물론 능력 있는 플레이어라면 서로 이곳저곳에서 모셔 가려 들 테니 경력에 다양한 "브랜드"가 훈장처럼 따라붙기도 하겠죠. 이상은, 책 프롤로그 p11과 본문 pp.60~80에 걸쳐 당찬 소신을 피력하는 정혜윤 스페이스오디티 브랜드 마케터(의 말)를 접하고 한 독자로서 든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