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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 : 하다

[도서] 시크 : 하다

조승연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제가 어렸을 땐 부모님들이 "얘가 다 클 무렵엔 추석이니 설이니 하는 전통 풍습이 다 사라지고 없을 거야."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제 추석을 고작 몇 주 남긴 시점이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 같은 게 한반도의 늦여름, 초가을 분위기를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이 풍기긴 합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 대다수 사회인들은, 여튼 어떤 전통적 방식 같은 걸 서서히 잊거나 자진해서 버려 가는 중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근래는 옷 입는 스타일이나 먹거리 등의 취향, 몸 담는 회사 조직 등의 구조뿐 아니라, 유머의 개성이나 대인 관계 등의 패턴(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 DNA의 특질에 밀접히 기대고 의존할, 어떤 정신 심층의 개성)도 미국인들의 그것을 너무도 닮아가는 추세가 확연합니다.

조승연 작가는 프랑스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신간에서는 "프랑스식 삶"의 짙고 독특한, 그러면서도 어쩌면 전세계가 선망의 눈길로 볼지도 모르는 "모두스 비벤디"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그가 프랑스인들의 모두스 비벤디에 대해 규정한 한 마디 키워드는 "시크:하다"입니다. 잘 아는 주제일 듯하지만, 날카로운 지성, 유독 교육에 열성이었던(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한국 중산층 평균을 감안하더라도) 집안 분위기, 작가 특유의 사회 계층 구조에 대한 관심, 통찰 등을 우리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으므로 책에 대한 기대를 좀 높이고 읽어 나갔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시크한 삶"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정말 뭘 잘 안다기보다는 그들 민족이 오래 전부터 잘 가꿔 온 (어찌보면 대외용 같기도 한) 자유롭고 우아하며 세계 동시대의 트렌드를 멀찌감치 앞서가는 그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 우리는 정작 실체와 내력과 구체적인 양상을 이해도 별반 못하면서 지레 찬사부터 베풀고 드는 건지도 모릅니다. 프랑스다운 게 뭔지도 모르고 솔직히 뭐가 "시크"한 건지도 모르면서, 여튼 프랑스인들은 시크하다고 "인정"부터 하고 봅니다. 자기 관점 뚜렷하고 실제 오랜 기간 현지에서 살아도 봤으며 똑똑한 한국인이기까지 한 저자의 설명과 논평이라면 한번 따라가 볼 만하죠.

요즘은 우리도 "나는 자유연애주의자"란 표방을 주위에서 아주 드물지는 않게 듣습니다. 부모님이 정혼해 준 상대방과 맺어져야만 한다는 관념과 반대인 "연애결혼" 등을 뜻하는 게 아니고요. 애초에 결혼도 안 하고, 사귄다고 공인된 상대와 만나는 중에도 다른 상대가 나타나면 거리낌 없이 잠자리도 함께하는 풍조를 그리 부른다고 하는군요. 아직 중매결혼이 대세였던 세대 어르신들이 버젓이 살아계신 현대 한국에 대놓고 이런 풍조가 생긴다는 게 좀 충격이기도 합니다. 헌데 이 책에서, 조승연 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유연애주의자들이었던" 프랑스인들의 시크함을 좀 길게, 또 작가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곁들여 우리 독자에게 소개합니다.

조승연 작가의 책 장점 중 하나는, 어느 한 가지 주제를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그야말로 책 쓰기 책 내기를 위한 단발성 주제를 얕은 지식으로 (짜깁기 포함) 논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긴 숙고를 거치고, 사실(fact)를 깊이 공부한(=직접 체험한) 후, 여러 다른 논자들의 견해를 충분히 공부한 후에 한 마디를 꺼내어도 꺼내는 데에 있습니다. 성(性)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언제나 관대했는데, 그 배경을 저자는 풍요로운 삶, 경제 여건 등에서 찾습니다.

본래 유럽은 여러 작은 소국, 공령 따위의 모임이었습니다. 독일만 해도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듯 무려 300개가 넘는 작은 정치 단위들이 모인 영방(領邦)체였고, 이탈리아 반도에 십 수개의 공국, 공화국, 자치도시 등이 모여 옥신각신해 온 내역은 천 수백 년이 넘습니다. 스페인? "두 가톨릭 군주"의 치세 수십 년을 제외하면 각 주(州)가 내내 분열에 가까운 자치를 누려 왔으며, 그 극단적 취약상이 20세기 전반에 노정되었고, 지금도 까딸루냐가 독립해 나간다고 아우성입니다. 영국은 18세기 초에서야 스코틀랜드와의 물적 통합이 간신히 완료되었지만 다시 심각한 분열을 마주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그저 한 유서 깊은 가문의 개인 영지에 불과했습니다. 영토, 인구 면에서 그나마 큰 덩치를 이루고 통합 국가 단위를 오랜 동안 일궈 온 나라는 서유럽에서 프랑스가 거의 유일합니다.

이런 프랑스였기에, 산업 혁명 이후 간신히 일정한 경제적 풍요를 이루고 생경한 성 윤리를 정립한(그나마 오래 가지도 못한), 예컨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회 같은 (급조된 엄숙, 경건) 분위기를 프랑스인들은 아주 우습게 봅니다. "졸부의 호들갑" 정도로 폄하하는 겁니다. 과연 그런 통찰이 옳았는지, 영국 사회는 이른바 "서프라지" 운동 등을 계기로 여권의 범위 획정을 두고 큰 내홍을 겪었으나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이 이슈에 대한 갈등이 덜했습니다. 프랑스는 1968년 이른바 "5월 위기(이것은 보수 매체에서 부르던 명칭이고, 현대 프랑스인들은 자랑스럽게 "68혁명"을 논합니다)"를 통해 사회 구조의 적폐를 꽤 큰 폭으로 떨궈 내었는데, 이때 이 거대한 "실험장"에서 시도된 건 정치 형태뿐 아니라 전통적인 가정의 족쇄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부정, 회의였습니다. 작가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을 잠시 인용하는데, 여기서 다뤄진 "남매 간 연애"는 그저 감독 개인의 추잡한 소재 터치가 아니라 실제로 근친 상간의 금기에 도전한 "68세대의 미친 모험"을 실사(實寫)한 의도였다고 합니다.

p80에서 저자는 폴 클로델의 시 한 편을 인용합니다. "와인은 세 가지 성찬식이다..." 태양과 땅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인 와인(이하 이 단락 대부분의 특이 표현은 모두 이 책 pp.80~81에서 인용한 것입니다)은, 유독 프랑스가 세계에 높이 자랑하는 특산물인데(물론 다른 나라 와인도 좋은 게 많고 우리 한국인들도 슬슬맛을 들여가지만요), 이 중에서 '코미뇽"에 대해 저자는 그 어원을 거론하며 성찬식 외에 "하나됨"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영어에서도 가톨릭을 신앙 배경으로 삼는 이들(미국 이민자들 중)은, "퍼스트 커뮤니언"을 매우 중시하는데 한국말로 옮기면 "첫영성체"입니다. 어디 성찬식뿐이겠습니까? 공산주의를 뜻하는 "커뮤니즘", 공동체인 "커뮤니티" 등 이 계열의 어휘 대부분이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축복받은 대지를 일구고 자라난 프랑스인들이 음식 문화에 각별히 긍지를 가지는 건 사실 당연합니다. 식재 혹은 메뉴 간의 조화, 궁합을 뜻하는 "마리아주(mariage. 영어와는 철자 하나가 다른)" 역시 본래는 결혼이란 뜻이며, 바로 위 문단 인용 "태양이 땅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 같은 표현에서 그 연유와 맥락이 너무도 잘 이해됩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기준에 맞춰 자신을 적응시켜 살아가는 삶이 한편으로는 성실하고 올곧고 질박하며 도덕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특히나 한국처럼 인간 관계에서 큰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사회에서는 종종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복해지는 대로 살면 안 될까?" 같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삶은 물론 우리네 한국인들의 전통적 삶의 방식과 큰 차이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 방향, 기계적 성과 수치만 추종하는 미국식 자본주의 의 한 대척, 대안이기도 해서 새삼 우리들의 주목을 끕니다. 명절도 다가오는 이 시점에,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과연 이대로도 괜찮은지 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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