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게 없는, 찬연하고 자랑스러운 정신 문화를 지닌 나라입니다. 어느 외국인이 "그걸 증명해 보라."고 감히 요쳥한다면. 우리는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조선사 실록은 단지 그 기록의 양적 방대함 뿐 아니라, 내용의 진실성, 과학성, 스칼라십, 그리고 "춘추 필법의 대의"로 요약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의 엄정성과 윤리성에 그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야마는 올곧은 선비 정신이, 페이지 하나 글자 한 획에까지 정론 직필의 혼을 스며 넣었고, 그 서릿발 같은 대쪽의 기개는 오늘날을 사는 문화인, 저술가들에까지 영향을 미쳐 불의에 대한 준엄한 고발, 정의에 벗어나는 비위에 대한 가차없는 성토를 서슴지 않는 저술의 기백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과학이며 객관을 가급적 지향해야 한다는 요청에 의해, 비록 당대인 혹은 저술가 개인의 관점에 어긋나고 정의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행적이라 해도, 왜곡 없이 팩트사항을 그대로 후세에 전한다는 르포의 사명 역시 저버릴 수 없는 미션입니다. 그래서 역사, 특히 실록류의 저술은, 전인적 자질이 요구되는 일대 과업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박영규 선생님이 쓰신 그간의 대중서들을 읽으면서, 지식의 정리와 역사관의 함양에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아 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이 쓰신 기존의 대중서들은, 주로 근대 이전의 시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고, 일차 문헌을 대상으로 대중의 기호에 맞게 편집한 저술들이 대종(大宗)을 이루어서, 사관의 정통 형태나 저술 방식에 대한 습득적 고찰의 노력까지는 책을 읽으면서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역저,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을 통독하고는, 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건국 후 60년이 채 안 되는 헌정의 역사라고는 하나, 한 권으로 과연 지난 내력을 다 훑을 수 있을까. 현대사를 소재로 하면, 제아무리 솜씨 좋은 저술가라도 결국은 자아류의 함정,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또하나의 논란을 빚어내기 십상이 아닐까 하는 회의는, 책장을 넘기면서 말끔히 사라져갔습니다. 팩트사항은 엄정하게, 그러면서도 한정된 분량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경제성의 원칙을 충족하고 있었으며, 서술의 방식은 곧고도 강직하며 감상적 주관의 치기 어린 개입을 단연 배제하는 긴장으로 가득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담은 내용의 정보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 배경의 태도, 어조, 정신에서 습득하는 교훈이 더 큰 비중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포맷의 적정 분량이 주는 효용성, 문체의 평이함이 주는 가독성, 내용의 풍부함이 주는 정보성, 그 담은 정신의 건전함이 주는 교육성을 모두 지닌 명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서문을 읽어 보면, 참으로 무거운 표현과 문장으로 가득합니다. 이 책을 제가 "정보 습득용"으로 단순히 단정함에 그치지 않는 까닭을 들자면, 바로 이런 압축적이고 깊은 사유의 흔적을 가득 담은 서문이, 책의 전개 방향과 기조를 독자에게 효율적으로, 예비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기괴한, 그리고 기구한 운명의 이란성 쌍생아의 비유를 듭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키워졌고, 서로 너무나 다른 스타일 때문에 죽기살기로 싸웠으며, 심지어 생존과 성장 과정 동안 상대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은 비극적 앙숙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박 선생님은 굳이 명시적 언급의 수고를 않고 있지만, 물론 우리 독자 누구라도 그 진의의 짐작에 실패할 리 없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환희와 감동을 누릴 사이도 없이, 분단과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지상 유일의 민족, 바로 우리들이 치르고 현재도 아프게 진행 중인 남북 대치상을 두고 이른 비유이겠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이 자립할 수 있는 성년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20년 정도가 소요되지만, 국가의 성숙에는 다른 두 세대를 당대의 주축 세대가 함께 이끌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의 세 배가 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양김씨의 민주화 과도기를 거친 후, 세대 단절이라 할 만큼 새로운 분위기의 지도자가 등장하고 대중 일반의 참여도가 현격히 증가한 2003년 정부 출범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청년기 그 시작으로 잡아 마땅하다는 견해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관점입니다. 비록 성장기에 거친 우여곡절의 부작용으로 그 외모가 기괴하나, 어느 누구 못지 않은 활력과 가능성으로 무장한 채 미래를 주시하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구체적인 비전을 점치려면, 지금까지의 성장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양해야 하는지 주시하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장은 이승만 대통령편(이승만 실록)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입헌 이래 총 10인의 대통령을 겪은 국가이므로, 이 책도 각 장에 한 명씩의 대통령을 할애하여 10장 체제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평전 저자로 유명한 김삼웅씨의 경우, (국부가 아닌) "독부" 이승만이라는 제목을 단 책을 내었을 정도로, 지금 우리 시대의 주류적인 평가는 이분에 대해 박한 점수를 주는 편입니다. 한편으로 보수 일각에서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명예에 흠이 가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오히려 반대 방향의 재조명,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기도 하고요. 제가 이 책에서 박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한 건, 시대 분위기의 각 성분 함량이랄까 가중치 요소를 적정하게도 고려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도 정의되는 "역사"의 소명, 본분에 걸맞게, 정치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당대인의 표준 정서를 고려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장 뿐 아니라 이후에 이어지는 9개의 챕터에서도 이런 공명하고 실용적인 태도는 일관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이지만, 취임 당시 그의 나이는 벌써 여든이 가까워지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거의 아찔할 만큼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령에 접어들어 보인 그의 교활하고, 때로는 반민족적이며, 때로는 마키아벨리를 능가하는 권모술수의 서술에만 치중한다면, 아무리 이 책이 "대통령 열전"이 아닌 "대통령 실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해서, 이 책은 이승만의 출생 배경, 젊은 시절(비록 그것이 대한민국 출범 아득한 이전 시점의 일들이라고 해도)까지도 살짝 다뤄 주고 있습니다. 인물의 진가와 영향을 바르게 평가하려면 이런 접근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의 아호가 "우남"이라는 사실은, 어지간한 노인층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수가 많습니다. 이 책의 또하나 빼어난 점은, 팩트이긴 하나 그 배경까지 샅샅이 알려지지 않은 사항에 대해, 용케도 필요한 만큼 짚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자란 곳이 남산 서쪽의 도동인데, 그곳 우수현의 남쪽을 지칭하는 말로 "우남"이 호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유력자, 혹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계기는 바로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독립협회에는 오늘날 감각으로는 놀랄 만큼 새파랗게 젊은 인재들이 많이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승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대한 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면서 많은 지사들이 일신의 안녕, 혹은 시국에의 비관적, 체념적 예측 때문에 훼절의 길을 걸었지만, 이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이나 미국 하와이 등을 옮겨다니며 독립 운동을 폅니다. 그러나 이 책, 혹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행보는 때로 진의를 의심 받기 충분하게, 사리사욕과 권력 추구를 위한 선택이 많이 포함되고, 또 그런 동기를 주축으로 하여 현실화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해방이 되었고,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북과의 절연을 추구한 "단정 수립"에 치중하여 이를 관철해 내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의 성격 규정을 놓고 보이는 박 선생의 태도는 흥미롭습니다. 참가국의 수로 보나, 국제 정세 속에서의 함의로 보나, 이 전쟁은 "세계 전쟁"이라 불러 마땅하다는 겁니다. 동방의 고요한 나라가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된 첫 계기가 동족 상잔의 비극이라는 점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런 소모적인 전쟁 발발의 단초 중 하나가 당시 정부의 무능으로 북한군 남침 초기 단계에서의 진압에 실패한 사실이라는 점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평가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치는 팩터입니다.

이승만의 몰락은 다음 대통령인 윤보선의 부상과 동전의 앞뒤 관계를 이룹니다. 한국전의 아픔을 겪고서도 정치와 행정은 효율과 건강성을 회복할 줄을 몰랐고, 민생은 도탄지경에 빠졌습니다. 보수정당이라는 한계는 분명했지만, 민주당은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대안의 수권 세력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 책에도 잘 나오는 바처럼, 이승만이 제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선거에서, 이미 고인이 된 신익희 후보가 이른바 "추모표" 명목으로 엄청난 득표를 기록했으며, 해방 이후 초유라 할 진보정당 후보인 조봉암 씨가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대등한 승부를 펼친 점도 크게 주목해야 합니다. 4.19혁명은 이미 이 시점부터 태동되고 있었으며, 이승만은 이미 위기를 감지하고 변혁의 싹을 자르려 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입니다. 윤보선은 그 계보와 출신 배경 면에서 이승만과 크게 다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상공장관 재임 시절, 자신의 소신이 관철되지 않자 수뇌부와 마찰을 빚었고, 이후 우남과는 대립하는 노선을 걷게 됩니다. 혁명 이후 의원내각제(건국 초기 이승만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체제로 출범했겠죠)로 전환된 구조에서 그는 라이벌 김창숙을 꺾고 무난히 당선됩니다. 그러나 실세인 장면 총리와의 정쟁으로 효율적인 정책이 집행될 날이 없었고, 정부의 무능은 군사정변의 빌미를 주기에 이어집니다. 윤보선의 정치적 커리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두 차례의 선거에서 박정희 현직과 대결하여 집권층을 긴장시켰으며, 1970년대에는 젊은 신진 야당 정치인과 재야세력을 막후에서 후원하는 위상에 이릅니다. 이 장 마지막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 장면 총리의 경우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사실상 군사정변으로 실각하고 몰락한 사람은 윤보선이 아니라, 실세였던 장 총리였습니다. 그는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되는데, 장 총리가 한때 후원을 해 주었던 정치 초년생 김대중의 진로와도 관계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최규하씨는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절차 없이 법률의 규정에 의해서만 직위에 오른 유일한 경우입니다. 이 점 관련해서 공화당 당 의장을 지내고 10.26 직후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지냈으며(본인의 표현),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실세 중 하나로 군림한 박준규씨의 언급이 의미심장한데, 다른 현대사 책에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자료를 보게 되어 유익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공정합니다. 보기 드물게 청렴한 공무원이었고, 원칙주의자였음을 거론합니다. 다만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신군부에 권력을 내주었으며, 이후 부정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로 굳었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을 하는 대목에서 "그의 권력욕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진단하는 부분은, 아무리 애써 선해하려 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덕목은 "권력욕"이 아니라, 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의지와 용기 아니겠습니까?

전두환 시대의 중요사건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유혈 사태로 집권한 권력의 장악력에 처음으로 금이 가게 한 계기는 바로 이 스캔들이었는데요. 이로 인해 당대 으뜸가는 시중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그 운영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드러난 경제 비위가 이 정도였으니, 드러나지 않은 부패상이 어느 정도일지는 당시에 이미 짐작이 되었지요. 그 어느 정도의 실상은 다음 정부인 노태우 시절 국회 청문회 활동을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전두환 시대 이른바 3저의 호황이 있어 경제의 최활성화 분위기를 누렸다면, 노태우 시기에는 전세대란(지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걸프전, 물가 폭등, 중소기업 연쇄 도산으로 인해 국민이 체감하는 형편이 크게 나빠지게 됩니다. 이 두 장(전-노)에서 역시 눈여겨 봐야 하는 부분은, 그 시기 재임했던 역대 국무총리들을 정리한 대목입니다. 이들 인명을 잘 파악하면, 현재 각처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는 한국판 귀족의 면면이 줄줄 엮이듯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서술은 단지 "실록"이라는 외형의 구색만 의식한 소치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사회상 파악에 대한 유용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순기능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박 선생은 양김씨가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던 10년을, 국가의 "청소년기"로 표현합니다. 지난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또 지난 시대 각고의 노력과 굴곡을 거쳐 마련한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여, 의식의 각성과 다양한 시행 착오를 통해 진정한 국민 자치의 기반이 마련되던 시대라고 할 수 있죠. 두드러진 변화라면 이동통신과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경제 성장과 내수 향상을 위한 도약의 발판, 그리고 참여 민주주의의 인프라적 뒷받침이 실체를 이룬 시기라는 점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후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5년 후 이명박 대통령이 뒤를 이은 10년을 박 선생은 국가의 성년기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 수명의 3년이 국가의 1년에 해당하므로, 지금 한국이라는 영혼을 지닌 실체는 아직도 좋은 나이인 22살 정도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앞길이 창창한 청년의 미래일수록, 지난 과거를 조심스러운 성찰의 자료로 삼아, 후회 없는 미래를 준비하는 기름진 텃밭으로 일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제가 이 리뷰 앞부분에서 "공자의 춘추 필법"을 거론했습니다만, 현대에 있어 정론 직필의 준범과 교본은 그럼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자의 이에 대한 답은 미리 준비나 해 놓았다는 듯 명쾌합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길지도 않은 바로 그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초라하고 궁색한, 때로는 가증스러운 현실주의의 요청도 이에 우선할 수 없으며, 또 어떤 권위 있는 도그마도 이에 앞서 고려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당위이며, 이제는 매 순간을 현실태로 물들여 나가야 하는 대원칙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