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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세트

[도서] 김종필 증언록 세트

김종필 저/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편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아무리 탁월한 족적을 남기고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도 사람 자체를 놓고 "역사"라 일컫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 인물에 대해 찬반과 호오가 치열하게 엇갈리는 실정이라면 어떤 중립적인 규정을 시도한다는 것부터가 지난한 작업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모르지 않지만, 왠지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그리고 근엄한 평자까지 겸하는 중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그가 곧 역사였다"라는 비유적 평언을, 좀 다른 의미에서 허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역사(일단 자유당 집권기를 제외하면)의 결정적 전환점에는 그가 항상 자리해 있었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한 주역(이때 그는 실제로 예비역이었으므로 병력 동원의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았죠)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3선개헌(처음에 그는 반대 입장이었고, 여당 내에서 집중적으로 반대했던 인물들은 바로 그를 옹립하려는 의도였죠), 유신, 신군부의 등장, 여소야대 정국의 캐스팅 보트, 3당 합당, 그리고 마지막 DJP 연합까지, 한 개인이 이처럼이나 정계에 오래 머물고 그 머문 기간 동안 현대사의 전환점적 사건들에 모조리 개입할 수도 있는 건지, 이 두꺼운 책 페이지를 넘기고 쓰다듬을수록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 개탄스럽다는 감회, 이 양가의 상념이 동시에 머리 속을 교차합니다.

얼마 전 타계한 YS의 경우 심한 고초와 격렬한 투쟁의 시기를 겪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치욕, 몰락의 쓴맛을 인생에서 다신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JP는 "영욕의 인생"이라는 말이 잘 걸맞을 만큼, 영화로울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였고, YS나 DJ와 결별할 때는 노년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곤경에 몰린다는 느낌을, 그에게 공감할 아무 이유가 없는 입장에서도 지울 수가 없었고요. 이 거대한 생은 언제나 공적 인생이었고, 그의 부상과 몰락 모두가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던 중대한 사건들과 긴밀히 엮여 있었습니다.

이 책은 케이스입으로 1권, 2권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회고록을 1,2권으로 나눠 내는 게 보통인데, YS나 이종찬씨, 박철언씨 같은 경우는 케이스입도 아니고 하드커버도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은 이 책처럼 하드커판 2권 묶음이었고요. 이 회고록들을 저는 일일이 구입해서 꼼꼼히 읽어 본 독자지만, 이 책은 그런 기록들과는 또다른 개성을 풍긴다는 느낌이 지금 정리됩니다. 솔직히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렴풋이나마 한 문장으로 적어 보자면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보다 솔직한 태도로 털어 놓았다" 정도겠습니다.

얼마 전(이 책 출판 기념회 말고, 그의 구순 잔치 때), 그는 대단히 격노한 어조로 5.17 특별조치 당시 신군부의 재산 환수 처분에 대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당시의 그 참담한 처지에 대해, 독자가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히 술회합니다. YS에 의해 문민정부에서 축출당했을 때, (이 증언록에는 안 나와 있으나) "이것보다 더 힘든 일도  다 겪어 봤다."고 결기를 다지기도 했죠. 이 증언록에서 그는 YS의 회고록 일부를 인용하며, "김종필을 붙들어 두지 못한 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한 말을 문언 그대로 믿고 싶다며 담담한 심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읽어 보면 저자는 "믿고 싶다"고만 했지 그 말이 틀림없겠다거나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아전인수격 왜곡이나 미화, 윤색이 최대한 절제된 게 특징입니다. 이런 말까지 다 털어놓는다는 게 자존심이나 감정적 이유에서도 쉽지 않을 텐데 싶은 대목이 참 많았습니다. 워낙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보니 회고록에 그런 말이 당연히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치부나 좌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저런 가감없는 태도를 취하기란, 유명인이 아닌 우리들 대중의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게 아니죠. 공산주의식 강제 자아비판이 아닌 이상, 당사자 본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중에는 가장 솔직한 한계까지 가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역사의 결정적 순간 근접 거리에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르포도 시중에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법 묵직한 평론과 일차사료에 가까운 중요성을 담은 것도 있고, 잡담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런 저널리즘의 충실한 "증언"들을 균형감각 있게 읽고 취사선택을 하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조감도를 머리 속에 그리는 게 보통이죠. 이런 기록들과, 정치인의 "회고록"은 대체로 내용이 크게 상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양식 있는 독자라면,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겠다 싶은 저널 쪽을 더 크게 의존하는 게 보통이죠. 그러나 이 책은, 거물급, 아니 그 정도 말로는 올바른 형용이 어려운 초거물급 인사 본인의 입으로 털어 놓은 증언을 정리한 내용인데도, 시선이 담담하고 초연하며 공정합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박정희 정부에서 모두 국무총리를 역임한,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이 지니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력을 갖춘 진귀한 케이스입니다. 성향이 전혀 상반되고 화해가 불가능한 정적 둘과 차례로 손을 잡고, 두 권력자들로부터 모두 견제를 받았으며, 그러면서도 두 권력자 모두 그의 힘을 어느 순간에는 절실히 필요로 하며 자세를 낮추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이 긴 책을 읽으면서 끝까지 뇌리에 머문 느낌은, 이분이 박, 김 양 진영으로부터 비교적 비슷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읽어 보면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 업무 능력과 추진력 등에 대해서만 높은 평가를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처삼촌이기도 한 그에 대해 가슴이 사무칠 만큼 감정적 접착을 보이지는 않습니다(기념관 건립 건은 그저 의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하고요). "유신 정권 치하에서 겪은 일은 살아 있는 내가 대신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는 대목에선, 정계를 누빈 그 수많은 실력자들 중에 진짜 인간의 가슴을 지니고 사내다운 낭만과 진심을 유지한 이가 이분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회고록"이 아닌 증언록입니다. 책을 JP가 직접 쓰지 않고 기자들한테 들려 준 이야기를 다른 필진이 정리한 까닭도 있지만, "회고록"에서 흔히 드러나는 아전인수식의 위증 없이, 역사의 법정 앞에 선 증인의 겸손된 자세로 담담히 들려 주는 "자신과 매듭매듭 결부된, 상처 많은 한국사"의 진술 자체라는 점에서, 이 제목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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