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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도서] 여자 없는 남자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이종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헤밍웨이의 가장 큰 매력은 번잡한 수사(修辭) 없이, 정확하면서도 간결하게 선명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는 듯합니다. 문학에 있어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대명사처럼 거론되지만, 막상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문장이 우수와 감성에 젖을 때도 많고, 번잡한 상념과 사소한 잡담으로 단락이 채워질 때도 많습니다. 여튼 그는 단편이든 장편이든 깔끔한 구성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단호한 장인인지라, 어느 누가 어느 시점에 읽어도 그의 작품은 진위를 혼동할 수 없는 시그너처를 분명히 드러내 보입니다.



이 책은 편집자도 편집자였겠지만 작가로서의 그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묶어낸 작품집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문구가 대체 뭔 뜻일지 호기심을 부르는데, 이 작품집 중에 그런 제목을 단 단편은 실려 있지 않고 행여 다른 기회에서라도 그가 그런 작품을 창작한 적도 없습니다. 수록된 단편(어떤 건 중편에 가깝게 긴 분량입니다)을 모두 읽고 다시 책에 붙은 제목에 눈을 돌린다면, "아 그래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독자의 그런 반응을 다분히 의도하고 이 작품집을 묶어낸 작가로서의 고집과 소신이, 어쩌면 그렇게도 개별 작품의 문장 곳곳에서 묻어나기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집에서 제법 분량이 긴 두 편을 꼽자면 <The Undefeated>와 <Fifty Grand>이겠습니다. 전자는 책 맨처음에 실려 작품집의 분위기를 설정, 주도하는 역할이란 느낌이던데요. 주인공은 1인칭 화자인 마누엘입니다. 마누엘은 전성기가 지난 퇴물 투우사인데, 한 번 출연(공연)으로 (비교적)큰돈을 손에 쥘 수 있는 투우사 노릇이 매력도 있거니와, 그보다는 "늙고 퇴락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 순순히 인정할 수 없어, 병원에서 퇴원(아마도 직전 출연에서 잔부상을 입었나 봅니다)한 후 레타나 사장을 찾아가 흥정을 벌입니다. 확실히 한때 잘나가기는 했는지 사장은 내심 500페세타(현재는 물론 쓰지 않는, 스페인의 옛 화폐단위지요)를 마음에 두지만 반으로 후려쳐 가격을 부르고, 마누엘은 돈보다 일 욕심, 잃어버린 자존을 찾으려는 욕구에 휘둘려 300페세타에 합의를 보고 맙니다.

헤밍웨이의 독자라면 이런 초반에서부터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주인공 마누엘은 장편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께서는 권말의 후기(겸 독자가 꼭 읽어야 할 필수 해제)에서 저 장편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 작품을 유비하시지만, 꼭 핵심 주제뿐 아니라 작품 설정 디테일까지도 둘은 너무도 비슷합니다. 이런 캐릭터를 줄기차게 장편 단편 가리지 않고 그의 작품 속에서 줄기차게 그려 댄 건, (비록 성장 환경이나 누리던 물질적 풍요는 달랐어도) 헤밍웨이 본인이 사멸해가는 남성성과 부단히 투쟁하던 가상의(그리고 그가 접해 온 현실 속의) 늙은 남자들에게 무한히 공감했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종인 선생은 후기에서 "죽음에 대한 비정상적 공포" 때문에 그 반대보상심리로 생에 비겁자처럼 집착하는 캐릭터를 즐겨 창조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와는 조금 시선을 달리하여, 젊음의 활기, 대담무쌍, 민첩한 몸놀림 등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상남자로서의 자부심이 자기 존재의 첫째 이유였던 헤밍웨이(와 그의 부친까지)의 동기에 보다 주목하고 싶더군요. 사실 마누엘은 투우사로서 퇴물이다 뿐이지 몸이 아픈 데도 없고, 맘만 먹으면 다른 직업을 구할 수도 있고, 남자로서 아직은 어디가서 괄시 안 받고 제 구실 할 시절입니다. 다른 데서 "왕년 잘나가던 투우사" 같은 후광을 내세우며 딴 일을 하면 자존도 지키고괜한 육체적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는데, "한창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를 구태여 주변과 자신에 납득시키기 위해 모래판에 등장하는 거죠.

뼈만 남은 앙상한 황소는 주리토 같은 피카도르(이 책에서는 "기마 투우사"로 번역합니다)로부터 몇 번 칼질을 받았고, 떠오르는 루키이자 앞으로 이 경기장의 스폿라이트를 한몸에 받을 젊은 에르난데스의 능숙한 솜씨 탓에 큰 상처를 입고 기운까지 다 뺀 상태지만, 마지막 일격을 가해 경기를 마무리하려는 마누엘에게 빈틈을 내 주지 않습니다. 명시적으로 그런 표현은 없지만, 마누엘은 이 황소를 그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 대하듯 낭만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만용과 자기도취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늙은이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황소는 타자, 객체가 아니라, 바로 마누엘 자신입니다. 아마도 황소 역시 마누엘을 그리 보고, 젊은 투우사를 상대할 기력을 아껴 이 최후의 일전을 그에게 전력투구할 생각인 듯합니다.

마누엘은 소를 잘 다룹니다. 늙은 나이치고는 말입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는 않은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몸에 덜 밴 기술을 구경할 때면 감탄도 내뱉습니다. 오랜 고참에 대한 경의와 다소 뒤섞인, 썩 공정한 평가는 아니지 싶은데, 마누엘과 지난시절 내내 같이 경기를 뛰어 온 주리토는 단호히 부정합니다. "좋은 솜씨가 아냐." 동료에 대한 폄하라기보다 그의 둔해진 동작, 노쇠화의 흔적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난 반응이며, 독자들은 차라리 불길한 예언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노인과 바다>에서 그 야구 이야기 좋아하는 소년 이름이 "마놀린"이고, 지금 이 작품에서 투우사 마누엘의 애칭이 "마놀로(작품 통틀어 두 번 나옵니다)"인데, 이 두 이름은 모두 성인 남성 이름 "마누엘"에 지소사(指小辭)가 붙은 모습이란 점입니다.

구태여 늙은 마누엘이 레타나 사장을 찾으며 "나 마놀로일세."라고 한 건(사장은 그를 피하려고 처음에 인기척을 안 냅니다), 일단 친근감의 부각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호칭이 자연스러웠을 젊은 시절의 자신을 애써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죠. 레타나 사장은 (이후 술집 종업원들의 말에서 드러나듯) 쓸모가 다한 연줄은 가차없이 내치는 비정한 성격인데, 여튼 늙은 마누엘을 경기에 끼워 준 건 여러 동기가 있었겠습니다. 아마도 주리토와 비슷한 판단을 하곤, 뜨거운 맛을 본 후 영영 은퇴시키자는 속셈이 깔려 있었겠죠. 허나 이는 일종의 예우이기도 한데, 예의 그 종업원들 평가 "레타나 사장님과 친구라는 건 곧 성공한 인생이란 뜻이죠!"에서도 우리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투우사의 연기가 시원찮고 마침내 놓친 칼이 관중석까지 튀는 사태가 자(사실 꼭 시원찮았다기보다, 젊고 팔팔한 이가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건 만국 공통입니다) 관중들이 방석을 던져대는 건 마치 일본의 스모 경기 풍속도와도 비슷해서 읽으며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주인공 마누엘의 마음이야 굴욕과 비참함으로 가득찼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사력을 다한 마누엘은 결국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죽었단 소릴까요? 얼굴에 덮어씌워진 수건은 수술의 채비일 수 있고, 죽음이 임박했으면 의사가 아닌 사제가 배석했을 텐데 하는 판단을 내리는 걸로 보아 아직은 정신이 멀쩡하고 맑은 상태.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 듯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도, 타인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묘사에서, 근거 없는 자존 때문에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는 회한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헤밍웨이의 (마누엘의 눈을 빌린) 투우경기 묘사는 어떨까요? 여기서 제가 재밌게 본 건, 극의 전개에 별 필요도 없는 "이류 투우 평론가(이름도 안 나옵니다)"를 등장시켜, 판에 박힌 데다 경기의 실황에 낱낱이 몰입하지도 않은, 허접한 문장으로 투우를 보도하는 그의 행태를 꼬집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대 일류 비평가들에 비해 투우의 본질을 깊이 이해 못 한 채 실황을 그려 나가는 작가 자신에 대한 반성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비평가와 같은 수준으로 몰락해가는 마누엘의 다른 각도 투영임은 당연하겠고요.



<다른 나라에서>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될 듯하다 느닷 맞는 결말이 충격적입니다. 이종인 선생은 저 뒤의 <조국은 당신에게..>를 두고 "이색적으로, 논픽션이 단편집에 끼어 든 경우"라고 지적하시는데, 제 눈에는 이 매우 짧은 단편 역시 헤밍웨이 본인을 화자로 간주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자전적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겉모습이 처음에 준 인상(기대 혹은 공포)와 실상이 어긋날 때, 공정한 평가를 거두고 전술적으로 가혹한 태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죠.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혁혁한 무공을 세워서가 아니라. 사고로 인한 부상, 외국인이라는 법적 지위 때문에 훈장을 받습니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혹 이 주인공을 정말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로 상정해 보십시오. 남자다운 외모에 근엄하고 단호한 눈빛, 영화배우를 해도 어울릴 외관에 알고 보니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찬, "천성이 매와는 거리가 먼" 겁쟁이였다면 동료들이 전과 같은 시선으로 봐 주겠습니까. 저는 이 작을 논픽션으로 봐야 작가의 의도랄까 사건 묘사가 더 실감 있게 와닿는다고 봅니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은, 어려서부터 불교 설화를 읽거나 듣고 자란 우리 동아시아권 독자들에게 더 심상이 선명히 다가올 만한 작품입니다. 아마도 어느 젊은 커플의 대화를 엿듣고, 제3자의 눈과 귀에 여실히 그 허상과 위장, 현실 외면, 왜곡 등이 포착될 만한 상황을 소재로 삼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원치 않게 아이를 밴 여성, 기를 쓰고 중절을 권하는 남자(이런 말을 하는 자가 어떤 속셈인 줄은, 당사자만 빼고 다 압니다), 불안해하면서도 이 남자가 결국 애정을 거두지는 않았겠지 라며 헛된 기대를 놓지 않는 여자. 이 모든 게 서술자의 주관이 일절 제거된 채 녹취록처럼(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독자 앞에 제시됩니다. 툭툭 던지는 듯 무심하고 시시하게까지 들리는 대화 속에 천 마디 철학과 상념을 담는 게 헤밍웨이의 재주이며, 장편 <무기여...>에서 그의 이런 테크닉은 절정의 솜씨를 보인 것 우리는 다 알죠. 사실 저는 이종인 선생의 해석에 일단 반대하고 "하얀 코끼리"에서 뭔가 다른 속뜻을 캐치해 보려 애썼지만, 역시 통설 통념의 설득력은 쉽게 극복되는 게 아니더라는 게.

<딸을 위한 카나리아>는 뒤의 이종인 선생 후기에서 "모두에게 각각 하나씩은 있을 법한 카나리아"라는 해석이 더 멋있었고, 실제로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이 말이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결혼이란 으레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미국 부인의 지리한 "썰"이 유도하는 반향, 그런 절실하고 편협한 믿음(이지만 모두가 공유, 동감하는 역설)을 정면으로 배반한 채, 이 매우 짧은 단편의 주인공 부부는 파탄이 난 결혼에 마지막 치장, 위장, 포장 작업을 행합니다. 미국에서 파탄을 맞아도 별거는 파리에서 진행해야 격식에 맞다는 지독한 허세, 위선은 진정 충격적인 반전인데요.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단편을 작품집 맨처음에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야 왜 "(어떤) 남자들이 왜 여자 없이 인생의 잔혹한 단면과 맞서야 하는지" 혹은 "여자를 사이에 두지 않고 바라본 인생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답(역시 그림으로만 던져 주는)을 우리 독자들이 더 곰곰히 곱씹게 되기 때문이죠.

<간단한 질문>과 (저 앞의) <다른 나라에서> 둘 다 "이상한 소령"이 등장합니다만 물론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후자의 소령은 명백히 픽션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제가 앞에 지적한 "전자를 논픽션으로 봐야 한다"의 한 근거가 무너지기도 하는 셈인데요. 여튼, 여기서의 소령은 지속되는 불리한 전황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멘탈이 다소 교란된, 불쾌한 쪽으로 심성이 엇나간 모습입니다. 반면 전자는 이방인 청년에게 인생 선배로서 뭔가 바른 교훈 하나라도 전달해 주고 싶은,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상한 타입이죠.

<조국은...>은 정말 논픽션으로 봐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건조하고 쌩뚱맞은 사건의 연속, 그를 담은 일지에 가깝습니다. 어울리지도 않게 세 파트로 구성이 나뉘기까지 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좀 튀는 제목까지 붙어 있습니다. 허름한 승용차 문에 매달려 20km를 여행하다 못 견디겠는지 내리는 어느 파시스트 청년, 여성 종업원의 돈 안드는 구애를 끝내 거저절하는 잘생긴 독일인 가이, 그리고 다시 한적한 부락에서 영문 모르고 불량한 파시스트에게 벌금을 뜯기는 두 남자, 이처럼 서로 연관이나 맥락 없어 보이는 세 사건의 나열 뒤 지나가듯 붙인 코멘트가 인상적입니다. "이런 여행을 두고 무슨 평가를 남기거나 깊이 있게 살펴볼 거리가 있을 리 없다." 전체주의에 지독한 반감을 지닌 헤밍웨이가, 아름다운 고장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발호를 단지 급히 스쳐 지나가야 할 역사의 소란, 장난질로 본 감회가 잘 드러나죠.

<살인자들>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유명한 단편이죠. 아마도 승부조작 먹튀 행각 때문에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된 스웨덴 권투 선수의 신변을 둘러싸고, 불량배 두 명(신원이 천천히 밝혀지는 게 인상적입니다), 종업원 두 명, 요리사(흑인) 한 명이 겪는 소동이 중심입니다만, 피해를 본 이들은 엉뚱하게도 식당의 세 일꾼 말고는 없습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안에 권투 선수는 저 두 불량배(살인자들이라곤 하지만 어딘가 못미덥네요)에게 목숨을 잃을 것 같지만 소설은 거기까지 커버 안 하고 서둘러 막을 내립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는지 천천히 상황이 밝혀지는 건 맨 앞의 <The Undefeated>와 비슷합니다. 그 작품 속에서도 마누엘의 시선으로 레타나 사장이 작은 체구로 비춰지지만, 끝에 가서야 타인들의 시선으로 이번에는 늙은 마누엘 역시 왜소한 체구임이 조명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분석은 작품 속에 전혀, 화자의 내러티브 일부를 빌려서라도 그 단서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거장들이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통찰과 비의를 한 마디라도 더 지면에 담으려고 안달이었는지와 대조해 보십시오. 그들에 비하면 헤밍웨이는, 오로지 담백하고 선명한 심상 제시를 통해, "내가 지금 뭔 말을 하고자 함인지 독자 니네들이 눈치 채 보라"는 투나 마찬가지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래서 여백에 오히려 독자의 참여 공간이 늘어나고, 한정된 지면이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화자와 청자가 참된 소통을 이룬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우수 속에 진한 허무, 그를 통한 관조와 달관이 배어납니다. 왜 하루키가 이 작품집을 그토록 아꼈을까요? 청춘기에 그처럼 애독했다는 헤밍웨이의 세계에서 그가 배운 건 집념, 투지, 승부욕, 초탈까지는 아닐지라도, "알고 보면 별것도 없는 인생, 세계"에 대한 "허무를 직시할 건전한 용기" 정도는 충분히 우리 독자들이 공통분모로 엿볼 수 있을 텝니다. 그게 유독 하루키에게서만은 특유의 낭만주의, 엉뚱한 상상력, 위트 속에 휩싸여 있을망정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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