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한 강
"흰 것에 대 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흰 눈이다.
흰 눈
하늘 아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내리는 눈
이 땅에 내려서는 온 대지를 희게 가득 덮는 눈
그러다 어느 순간 태양빛을 받으면 흰 눈은 투명한 액체로 변한다.
흰 것이 투명한 무의 형태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 형태로 태어나 제각각의 모양을 지니고 살다가
소멸 앞에 서면 무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통증을 견디어 내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같다.
P 11
태에서부터 시작된 선택하지 않은 어린 삶의 시작은 여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 후에 세상을 맞이한다.
첫 허파의 호흡, 시선이 머물지 못하는 눈동자는 죽은 자의 것과 같은 듯 다르다.
이제 막 시작한 눈동자에는 설렘, 희망, 생명의 시작 다운 결의가 있다.
작가의 소설을 번역 중이던 폴란드 번역가 유스트나 나이 바르 씨를 처음 만난 2013년 그날 그녀는 작가에게 물었다. 내년에 바르샤바로 초대하면 오겠느냐고...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바르샤바에서 작가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나가 골목들을 배회했다.
공원을 목적 없이 걸으며 '흰 ' 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문은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녹이 슬어 있었고 녹물은 번지고 흘러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작가가 처음 한일은 흰 페인트 한 통을 사서 문을 칠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문은 새롭게 부활했다.
흰에 대해 생각했다.
강보, 배내옷, 달떡, 인 게, 눈에 가려진 흰 도시, 어둠 속에 모든 사물이 희게 보였다.
빛이 있는 쪽, 젖, 초
흰 초는 흰 불꽃으로 소멸되어갔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 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 81
우리의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 나가는 기적 그것은 우리의 흰 입김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하게 응축시킨 사물 흰 돌
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오해로 화가 나 어둠 속에 웅크려 앉은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과 어깨를 쓰다듬던 흰 손
모든 흰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P135
자작나무의 흰 침묵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용서이고
침묵은 끊임없이 쏟아내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흰 종이 위에 까만 글씨가 쓰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쓰고 있다.
그것은 흰 것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흰 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고 더 희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처럼 이 세상에 와 그 위에 무엇이든 써야만 하는 것이 삶이고 쓰이는 것이 어떤 글이 되는가는 나만의 책임이기에 그 책임이 너무 무겁다.
아름다움을 쓰고
용서를 쓰고
사랑을 쓰고
위로를 쓰고
격려를 쓰고
한강 작가의 흰
그녀의 오늘도 빛나는 흰 이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