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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일라이 클레어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

(p25, 아우로라 레빈스 모라레스의 추천사 중)

 

 

 

저자 일레이 클레어는 선천적 뇌 병변 장애인, 젠더 퀴어, 페미니스트, 친족 성폭력 생존자 로서 장애, 환경,

퀴어, 노동운동가이자 시인, 에세이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망명과 자긍심』은 1990년 출간된 저자의 대표작이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애학, 퀴어학, 여성학 분야에서 필독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경계 위에서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단일 쟁점 정치가 아닌 교차성에 주목하여 젠더, 섹슈얼리티, 성폭력, 퀴어, 장애, 계급, 환경, 노동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사유하며 오늘날 사회 저변의 모든 문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퀴어와 환경이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생태계의 순환처럼, 대두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파고 들어가면 서로 동떨어진 채 발생하는 문제들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한 잔의 커피는 계급과 폭력, 환경 그리고 노동과 관련되어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의 안락함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그 안락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관계를 모른 채 외면하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고 삶이라, 주장하리라.

그러나 상처는 통증이 심하더라도 소독을 하고 꿰매야 하는 것이다.

그냥 놓아두면 상처는 덧나고 치료의 시간을 더하고 낫더라도 그 상처는 보기 흉한 모습이 된다.

전도서 3장 7절의 구절처럼.

 

망명을 강요받은 몸들,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몸들,

망명이 곧 삶이었던 몸들,

그 몸들의 언어를 되찾고, 집을 되찾고,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에 관하여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제국주의·비장애 중심주의"

 

일라이 클레어와 함께, 망명을 끝내고 자긍심을 회복해야 할 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 몸들이 부딪히는 세계는 망명할 필요가 없었던 몸들, 집을 잃어본 적 없는 몸들, 장애를 겪지 않았던 몸들, 상처받지 않고 여자와 남자로 살았던 몸들 중심으로 설계된 세계일 것이다.

 

학창 시절 학급 내에서는 또렷한 목소리와 주장, 준수한 외모, 뛰어난 운동신경, 학습능력, 사고력으로 학급의 중심이 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학생을 추종하며 어쩌면 학급 주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세력에 편승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학생들도 당연히, 그 교실 안에 속해있다. 그것은 다르다는 것일 뿐인데 그 다름을 통해 서로 다른 역할을 키우고 장려해야 할 곳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 반'이라는 공동체의 운명으로 묶여 단합을 요구당하며 하나라는 체제를 강요당하는 한 교실의 문명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뇌 병변 장애를 앓은 저자는 학교를 다니며 장애인이기에 구별되었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떤 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서, 교육에 있어 다른 방법이 필요해서, 비장애 학생들이 '인재를 만들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비장애인 학생들로부터 구별된 교실, 구별된 관심, 구별된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야 했던 것들은 장애인을 위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들이 한 교실 내에서 살아가는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1969년 '특수교육'을 받길 원하는 학교 당국과의 싸움 끝에 '일반'학급 1학년에 들어간다.

지능지수 검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가 교장과 아는 사이였으며, 이웃집 교사가 일라이 클레어의 가족을 좋아해서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라이 클레어는 교실 안에서 방치된 상태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가 사소한 행동들에 어려움을 겪을 때 아무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고, 미완성된 과제를 교사들은 그냥 가져갔으며 학급 학생들이 그를 조롱하고 놀릴 때에도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따돌림을 받았고 어른들은 알아서 하라며 내버려 두었다고, 고백한다.

세상은 그곳이 그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라이 클레어는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는 '정상인'이 되고 싶었기 대문이다.

그는 '비슷한 사람에게 향하는 적개심'을 '이해'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바이섹슈얼을 싫어하고, 트랜스 섹슈얼 여성은 드랙퀸을 깔보고, 노동계층은 빈곤층과 싸운다. 많은 공동체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내적 긴장과 적개심을 만들어내며, 장애인도 예외는 아니다.

···

오늘날까지도 가까운 친구들, 내가 "선택한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다.

나는 장애에 대한 글을 쓸 때면, 종종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내가 종이에 이런 단어들을 적기에 충분할 만큼 장애인이 아니고, 장애 공동체에 깊게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수치심, 침묵, 고립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놓기 싫어해서 일부러 불을 붙인다.

그 불이 알아서 저 멀리서 잘 타고 있기를 바라며 그 불이 타는 동안, 모두가 그 불에 시선을 파는 동안, 그들은 어떤 일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그 불에서 눈을 돌려 불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물을 뿌려야 하는 일이다. 일라이 클레어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적개심을 갖게 된 근원은 그가 알게 모르게 뿌리 깊게 심어진 내면화된 억압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그 억압은 종양 덩어리처럼 스스로 생겨나는가?

억압을 형성하는 사회가 있다.

 

 

장애인 학생들의 교실과 교육이 구별 지정되어야 했던 것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결정이었을까?

비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선택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조금 부족한 그들을 참아주지 못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는 사회의 풍토 속에 특별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그들의 분리를 꾀했지만 그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재 좀 키워보겠다는데, 우리 아들딸 공부 좀 하겠다는데, 애들이 공부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이라는 비장애인 학생 학부모의 원성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은 서울 강서구의 장애인 특수학교인 서진 학교가 설립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국 특수학교를 다니는 장애인 학생들은 매일 왕복 1-4시간의 거리를 통학하며 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학생 수에 비해 학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어떤 비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단지 학생들이 스쿨버스로 통학 15분 거리를 감당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권의 침해, 학생들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 시위하는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사회는 다수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와 함께 소수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시골 소도시의 중산층이 되고 싶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뇌 병변 장애인이었으며, 젠더 퀴어였다.

그는 사회에서 이보다 더 취약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그는 교육받았고 대도시로 나와 세상과 부딪힌다.

 

그는 빈곤한 시골 도시의 환경에서 장애인으로서 어린 시절과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을 이야기하고 젠더 퀴어로서 대도시로 나왔을 때 목격한 상류층 젠더 퀴어들의 시골과 소도시에 대한 무지를 이야기하며 장애가 있는 몸으로서 사회적 억압과 대면하고 치열하게 부딪히며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들의 이야기보다 더 와닿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당사자이며, 교차지점에 있고, 직접 그 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여기서 돌아가자. 이 산은 내 발엔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우니까."

p 62

 

만일 당신의 몸이 이 산을 넘기 어렵다면, 돌아가도 된다, 내려가도 된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절망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과 자긍심이다.

일라이 클레어의 장애로 인한 증세는 조롱과 멸시의 표적이 되지만 그의 연인 루리는 클레어의 떨리는 손과 몸의 감각을 관능적인 선물로 받아들인다.

 

클레어에게는 수치와 괴로움, 고통이었던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일라이 클레어는 사랑받을 수 있는 몸의 가능성-자긍심을 찾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찾을 수 있고 또 회복해야만 하는 자긍심이다.

 

이 리뷰는 『망명과 자긍심』을 온전히 리뷰할 수 없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철심을 심듯 정교하며 정곡을 정확하게 지적하기 때문이고 광범위한 사유를 종횡무진하며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통찰력 때문이다.

 

『망명과 자긍심』은 앞으로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당신 자신이 서있는 그 땅이 어떤 경계 위에 있으며

그 교차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와 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알려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몸의 지배자도 될 수 없다.

일라이 클레어는 책의 도입부에 이렇게 써놓았다.

"바위와 나무, 언덕과 해변에게"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다.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억압을 가하지 않고, 그저 바람과 비와 태양열을 받으며 존재하는 몸들.

그 자체로 존재해야만 한다.

 

자연적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긍지로.

인류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는 많은 소수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멸시와 무관심 속에 그늘진 곳의 소외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침묵을 뚫고 나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차별에 맞서고 있다.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때라고 인정할 뿐이다.

인류의 모든 것은 자의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저/전혜은,제이 역
현실문화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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