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사회에서 불평등 논의가 나오는 이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
인간이 이타적이고 근면한 존재라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이상(理想)이다. 하지만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성인(聖人)이 아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따라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거나 노력해서 무엇인가 이루어낸 사람과 별다른 노력 없이 살아온 사람이 같은 혜택을 받게 된다면, 굳이 나서서 노력하고 희생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하향평준화가 가속되어 생산성이 하락하고 사회 전체가 결핍으로 허덕이는 파국을 맞이한다. ‘결과의 평등’만을 추구한다면 빚어지게 될 비극이다.
반면, 능력주의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p. 4]. 과정에서의 공정을 전제로 결과에서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기회의 균등’을 추구한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같은 출발선에서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뭔가를 이루고, 그 과실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 ‘같은’ 출발선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결과에서의 과도한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실질적인 사회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이는 ‘기회의 평등’에 담겨있는 한계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이 아니다.” [p. 348]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된 이후 ‘20 대 80 사회’를 거쳐 ‘1 대 99 사회’가 출현한 것은 이를 보여준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1900년대와 2000년대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을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은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등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p. 145]
이미 소득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을 낳고, 교육 불평등이 계층 이동의 사다릴 없애는 악순환이 현실이 되었기에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 51]
뿐만 아니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 앤서니 엣킨슨의 <불평등의 넘어> 처럼 불평등을 줄이자는 얘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능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능력과 도덕 판단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새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p. 5] 즉, 앞선 자[승자]에게는 오만을, 뒤처진 사람[패자]에게는 굴욕이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건의 평등을 위해
저자는 기본적으로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인드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건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다. 그리고 행운에 따른 혜택 (또는 부담)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p. 200]
저자는 이런 ‘행운’이라는 요소를 평등에 고려해서, 기존의 ‘결과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이 아닌 ‘조건의 평등’을 새롭게 제시한다. ‘기회의 평등’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로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 점을 무시하고 동일 업적에 대해 동일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기회의 평등’을 강요한다면 계층의 대물림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조건의 평등’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조건의 평등’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 하에 기본적인 경쟁 환경 및 조건을 균등하게 다져 ‘상대적 평등’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James Truslow Adams, 1878~1949)가 얘기한 ‘아메리칸 드림’,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 [p. 350]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조건의 평등’은 개인의 이익 추구와 사회 전체 이익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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