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이해하는 방법
인권, 즉 인간의 권리는 인종, 성별, 종교 등에 관계없이 인간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하면, 이유 없이 차별 받지 않을 권리이다. 동시에 이 것은 각 개인에게 전속(專屬)되어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할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인권의 개념은 너무 막연하다 보니 실생활에 있어서는 사실상 무시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의무보다는 권리, 남의 권리보다는 내 권리에 더 관심을 가지고 더 주장하다 보니 가진 자[有産階級] 혹은 목소리 큰 자의 인권만 부각되고 가진 것이 없는 자[無産階級] 혹은 침묵하는 자의 인권은 묻혀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인 김두식은 인권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거야1)”라고 정의했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인권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그 많은 경우를 직접 체험해서 인권의 개념을 몸에 새기기에는 너무나 짧다. 여기서 저자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영화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 “영화관에 앉으면 10분도 되지 않아 나와 전혀 다른 인생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고, 주인공과 똑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차별 받는’ 입장을 이해하면, 그 입장 때문에 생긴 내 마음을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대신에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데 그만큼 효과적인 수단입니다.2)”
시혜(施惠)나 동정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 특히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정상인”의 시선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세상의 이면(裏面)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시혜(施惠)를 베풀 듯 관심을 가지거나 동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또한 또 하나의 왜곡, 아니 차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진 자 혹은 목소리 큰 자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시각을 공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예컨대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청소년-학생의 인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교사의 인권이 침해 받을 수도 있다. 이미 학부모나 청소년-학생들에게 있어 교사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니라 지식장사꾼 내지 지식노동자에 불과하다. 학생지도를 하려다가 도리어 멱살을 잡히는 교사가 나올 정도3)로.
또한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는 그런대로 잘 갖춰있는 반면 피해자나 그 가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결과 “피해자는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뿐 아니라 사건 이후 생계곤란, 주변의 오해, 언론의 오보 등으로 2차, 3차 피해4)”를 입는 경우가 많다. ‘인권’하면 가해자의 인권만 떠올리다 보니 발생한 오류다. 보복범죄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피해자들이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좀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인권에 있어서도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런 자세가 결과적으로 모두의 인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세상에 똑 같은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2004)나 라울 펙 감독의 <해마다 4월이면>(2005)에서 그려진 르완다의 비극은 어쩌면 사소한 “‘우리 투치들이 후투보다 키도 크고 잘생겼고 똑똑하다’고 생각한 투치들의 오랜 후투 차별5)”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투치와 후투의 기원 및 차이에 대한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다름”에 기초한 근거 없는 우월감은 결국 끔찍한 제노사이드를 가져왔던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제노싸이드 영화들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다름’에 대한 것입니다. 죽이는 사람과 죽는 사람을 가르는 차이는 사실 너무나 사소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자꾸 ‘다름’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우리’끼리 모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노싸이드를 통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시도는 끔찍한 후유증만 남겼을 뿐입니다. 결국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6)”
내가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이 아니기에 그들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수는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왼손 두 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다름”과 “차이”를 부정하고 이를 “틀림”이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할 때 진정한 인권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의 시작인 DNA가 서로 다른 염기서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1)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창비, 2010), p. 4
2) 김두식, 앞의 책, p. 5
3) “부산서 중학교 女교사, 또 학생에 폭행당해“, <연합뉴스> 2012년 11월 12일
4) “처신 잘 못해서… 피해자 책임론 원인”, <세계일보> 2012년 6월 12일
5) 김두식, 앞의 책, p. 355
6) 김두식, 앞의 책, pp. 35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