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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에 실패한 비운의 망명왕, 산남국왕(山南國王) 온사도(溫沙道)

 

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이 사서(史書)에 처음 언급된 것은 의외로 늦은 시기인 7세기 무렵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유구국기(流求國記)유구국은 바다의 섬으로 있는 곳이다. 건안군(建安郡) ()으로 물길로 5일이면 이른다. 그 곳 왕의 성은 환사씨(歡斯氏)이고 이름은 갈랄두(渴剌兜)이다. 그 유래와 국왕의 대수(代數)는 알 수 없다. [東夷 流求國, 居海島之中, 當建安郡東, 水行五日而至. 其王姓歡斯氏, 名渴剌兜, 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라고 기재된 것이 그 시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4세기 추잔국[中山國]의 건국자인 삿토[察度; 재위 1355~1397]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리고 그 무렵부터 고려와 유구국(琉球國) 간의 교류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실질적인 교류는 삼산 시대(三山 時代; 1314~1429)’의 실력자인 추잔국[中山國]과 이어갔지만, 그 경쟁국인 난잔국[南山國; 혹은 山南國]의 건국자인 우후사토[承察度; 재위 1337 ~ 1396]1)가 조선으로 망명한 일이다.

 

왜 우후사토[承察度]가 조선으로 망명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탁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추잔국[中山國]의 몇 차례 송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힘없는 망명객에 불과한 그를 추잔국[中山國]에 넘겨주지 않고 대우해주었으니까.

어쨌든 조선으로의 망명 이후 우후사토[承察度]라는 이름은 태조 3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역사가들이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온사도(溫沙道)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쨌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태조실록 7(1398) 2 16일조에 유구국의 산남왕 온사도가 그 소속 15명을 거느리고 왔다. 온사도가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에게 축출당하여 진양(晉陽; 지금의 경남 진주)에 와서 우거(寓居)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衣食)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성계] (그가) 나라를 잃고 유리(流離)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 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고 한다.

[琉球國山南王溫沙道率其屬十五人來沙道見逐於其國中山王, 來寓晉陽, 國家歲給衣食, 至是上以失國流離, 賜衣服米菽存恤之]”라고 기록된 것을 포함하여 그의 행장이 여러 차례 기록되는데 후손을 남겼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망명은 성공했지만 귀화에는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

 

, 2003년 일본국립유전자협회의 한국인 DNA분석에서 17%의 오키나와인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온사도(溫沙道)가 이끌고 온 무리 15명의 자손들이 한민족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성공적으로 귀화하다 리(Ly) 왕조의 후손, 정선 이씨와 화산 이씨

 

트남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왕조[李王朝; 1009~1225]는 한국의 고려와 비슷한 성격의 호족연합정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베트남인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다. 정선(旌善) 이씨와 화산(花山) 이씨가 바로 그들이다.

 

족보에 의하면 정선(旌善) 이씨의 시조인 리 즈엉 꼰(李陽焜)4대 인종(仁宗; 휘는 乾德, 재위 1072~1128)의 셋째 아들로 왕위다툼에서 패해 북송을 거쳐 고려로 망명했다고 하고, 화산(花山) 이씨의 중시조인 리 롱 뜨엉(李龍祥)6대 영종(英宗; 휘는 天祚, 재위 1138~1175)의 둘째 아들로 리(Ly) 왕조가 멸망하자 고려로 망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Ly) 왕조의 4대 인종(仁宗)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 조카인 신종(神宗; 휘는 陽煥, 재위 1128~1138)이 제위(帝位)를 승계2)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선(旌善) 이씨의 시조가 리(Ly) 왕조 인종(仁宗))의 셋째 아들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쨌든 현재 베트남에서는 화산(花山) 이씨를 리(Ly)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1995년에 화산(花山)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도 므어이[杜梅] 당서기장(당서기장 재직 1991~1997) 등 지도급 인사들이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인 지위를 부여3)했을 뿐 아니라, 2002년에는 베트남 국립전통예술보존개발센터가 12월 17일에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리 롱 뜨엉(李龍祥)의 일대기를 그린 오페라를 발표4)하기도 했을 정도이니까.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박기현 저
역사의아침 | 2007년 03월

 



1) 삼산 시대(三山 時代; 1314~1429)이전에 존재했다는 에이소 왕조[英祖王朝]의 후손으로, 도첨대리(島添大里; 지금의 沖繩縣 南城市)의 접사(接司; 중국의 번왕부(藩王府)에 해당하는 지방 호족)로 있다가 자립하여 난잔국[南山國]을 세웠다.

하지만 그후 추잔국[中山國]의 쇼하시[尙巴志; 재위 1421~1439]에 의한 지속적인 침략이라는 외환(外患), 그의 숙부 오우에이시[汪英紫; 난잔국[南山國] 2대왕]의 반란이라는 내우(內憂)까지 겹쳐서 결국 조선으로 망명하게 된다.

2) 유인선, <베트남사>, (민음사, 1984), p. 118

3) 박기현,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역사의 아침, 2007), pp. 32~33

4)화산 李씨 시조 이용상 일대기 오페라로 발표”, 연합뉴스 200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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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란토끼

    신기하네요. 몰랐던 역사.. 요즘 아이들 역사 모른다고 쯧쯧할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3.05.17 22:2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1. 사실 저도 온사도 얘기나 정선 이씨의 시조 얘기는 몰랐답니다.^^;;
      2. 화산 이씨의 경우에도 신문기사에서 언듯보았던 것이 기억나서 인터넷 검색을 한 것에 지나지 않구요.
      3. 아무래도 국사가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역사에 대해 흥미를 잃은 탓이겠죠.
      게다가 예전과 달리 퓨전 사극이 대세다 보니, TV 드라마에서 재미를 위해 가공한 잘못된 지식도 증가해서 더욱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 아닐까요?

      2013.05.18 07:57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