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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하러 온 나라에 반하다,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

 

진왜란 최초의 항왜(降倭)로 알려진, 사야가(沙也可)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에서 3,000명을 이끌던 좌()선봉장이었다1)고 한다.

 

는 다른 항왜(降倭)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는데, 임진왜란 초에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점도 그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야가(沙也可)의 귀순 과정이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에 투입된 후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 1560~1597)에게 ~ 화살 한 번 쏘지 않은 채 4 20일에 편지를 띄워 귀순했다.2)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문집인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에서 3,000명을 이끌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沙也可)가 조선에 상륙하고 절도사에게 투항3)하였다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사야가(沙也可) 6세손인 김한조(金漢祚)가 김경서(金景瑞; 1564~1624)의 자손인 김사눌(金思訥)의 집에서 발견해서 간행하였다는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다. 만약 이 문집이 없었다면 사야가(沙也可)에 대해 거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문집에 일본인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선인으로서의 정서가 짙게 배여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위작(僞作) 혹은 후손에 의한 첨삭(添削)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쨌든 사야가(沙也可)가 성공적으로 귀화하여 사성(賜姓) 김해(金海) 김씨(일명 우록(友鹿)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金忠善)으로 살아간 것은 확실한데, 그가 귀화하기 전에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측 기록에 사야가(沙也可)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라는 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첫째, 사이카[雜賀] 조총부대의 리더인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 .

이 주장은 사야가(沙也可)와 사이카[雜賀]의 발음이 비슷하고 사야가(沙也可)가 조선에 일본식조총과 화약 제조법, 조총부대 전술을 전수하고 조총부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다는 점을 근거로 하 있다.

문제는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라는 이름이 사이카[雜賀] 조총부대의 두령이 대대로 물려받는 이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사야가(沙也可; 1571~1642)로 가장 유력한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는 스즈키 시게히데[鈴木重秀; 1546?~1586?]라고 하는데, 시기상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스즈키 시게토모[鈴木重朝; 1561?~1623?]일 가능성도 부정하지 못한다.

 

둘째, 오카모토 에치고노가미[岡本越後守]

울산성 전투 때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측과의 교섭에 참여했던, 항왜(降倭) 오카모토 에치고노가미[岡本越後守]를 사야가(沙也可)로 간주하는 주장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재정담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인데,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서 활약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야가(沙也可)와의 연관성은 높지 않다.  

 

셋째,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

사이난가쿠인[西南學院] 대학의 마루야마 야스나리[丸山雍成]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하 가운데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사람 가운데 김충선(金忠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조사하여,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 즉 原田五郞右衛門; 1560~1598]가 사야가(沙也可)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조총부대를 포함 4,000명을 이끌고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 15932월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다가 1598년 뜬금없는 전사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 모든 가설의 주인공들이 사야가(沙也可)와 연령대가 다르기에, 여전히 그의 정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지만, 일부러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야가(沙也可)’라는 가명을 쓴 것으로 보이는 그가 조선에 귀화한 이유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호()를 모하당(慕夏堂)이라고 할 정도로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의 예의(禮義)대중화(大中華)’인 명()의 문물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고,

둘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분없는 침략 등에 대한 반발이라고 본다.

 

특히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분없는 침략 야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 받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최근 일본에서는 그의 삶을 기려 한국에 와서 들러보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한 해 1천 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이곳[녹동서원(鹿洞書院; 김충선(金忠善)의 위패를 봉안한 곳] (온다고)4) 한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박기현 저
역사의아침 | 2007년 03월



1) 모화당문집(慕夏堂文集)>에 실린 강화서(講和書)에는 임진년 월 일에 일본국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를 조아려 조선국 절도사 합하(閤下)께 글을 지어 올립니다. ~ 제가 일찍이 동토(東土; 조선)가 예의의 나라임을 들었고, 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속으로 그르다고 생각하여 비록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봉이 되려 하지 않았으나, ~ 그런 까닭에 억지로 선봉이 되어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왔습니다. [壬辰四月日, 日本先鋒將沙也可, 謹沐浴墩首裁書于, 朝鮮國節度使閤下 ~ 僕嘗聞, 東土之爲禮義之邦, 又心非淸正之有意射天無名與師, 雖死於淸正之手下, 而不欲爲先鋒 ~ 故强爲先驅, 領兵三千, 及至本國]라고 되어 있다.

2) 박기현,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성씨>, (역사의 아침, 2007), pp. 109 ~ 110

3)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밀양부사였던 박진(朴晉)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된 것은 1592 5월이라는 점,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의 글들이 김경서(金景瑞)의 후손의 집에서 발견된 점, 김경서(金景瑞)의 글을 모은 <김경서유사속편(金景瑞遺事續篇)>에 실린 해당 강화서(講和書)에는 癸巳四月日, 日本先鋒將沙也可, 謹沐浴墩首裁書于, 朝鮮國節度使金公閤下라고 되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그가 진실로 싸우지 않고 박진(朴晉)에게 항복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4) 박기현, 앞의 책,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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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란토끼

    힝.. 댓글이 없어졌어요. ㅠㅠ
    대단하시다고 썼었어요. 전문가의 향기가 퐁퐁!!

    2013.05.21 20:06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1. 앗, 노란토끼님의 댓글이 길을 잃었나보네요.^^;;
      2.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3.05.21 21:13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