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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도서]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김동성 그림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품삯 받고 책을 베낀 죄

 

어느 필사(筆寫)쟁이가 있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책을 필사(筆寫)해주었고, 그 돈으로 작은 책방이나 하나 열어 아들과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필사한 책 가운데 천주학에 관한 것[천주실의(天主實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아에서는 아버지에게 최 서쾌(; 서적 중개상)의 행방과 책을 사 간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며 밤낮없이 고문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매를 맞다 몇 번씩 기절을 했다. 관아에 끌려간 지 여드레 만에 아버지는 산송장이 되어 돌아왔다.1)

 

사실 관리들에게 있어서 필사쟁이가 천주학쟁이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원인을 떠올려 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천주학 책을 사간 고객(대부분 양반)이 누군가가 관심의 초점이었을 테니까.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격이 된 문장(文匠)의 아버지는 품삯을 받고 책을 베낀 죄밖에 없는데 목숨까지 잃을 만큼 모진 매를 맞았다.2)그리고 그 장독(杖毒)때문에 어린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다. 고객에 대한 신의를 지킨 대가는 그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아이, 자라나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혈혈단신이 돼버린 문장(文匠)은 최 서쾌의 도움으로 책방 심부름꾼 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필사(筆寫)쟁이 아버지의 영향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글과 자연스럽게 친했기에 새로 들어온 이야기책을 정리하고, 주문 받은 책들을 배달하는 것은 능숙하게 하였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는 서툴렀다. 그렇기에 기녀(妓女) 미적(美笛)에게 멀쩡한 사내가 여러 여자를 희롱하는3)” <구운몽>을 권하려 했고, “아버지 손에 끌려 어린 나이에 기생집에 팔려 온4)낙심이에게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판 효녀 심청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러한 장이의 삶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최 서쾌의 심부름으로 홍 교리(校理, 5품 관리)를 찾아갔던 일이었다. 서재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에 감탄해서 무심코 던진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해준 홍 교리 덕분에 용기를 내어 몇 차례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러는 가운데 장이는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언문에 대한 장이의 편견을 지적하는 홍 교리의 답변이었다.

주인어른은 제가 아직 서툴다고 한문 필사 일거리는 주지 않습니다. 한문 필사를 해야 품삯도 오르고, 정식 필사쟁이로 인정받을 터인데……”

“그리 생각하느냐? 한문 필사를 잘해야 인정받는다고?

홍 교리가 걸음을 멈추고 장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한문이 언문보다 손도 많이 가고 어려우니, 이 바닥에서도 그렇고 필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리 생각합니다.

장이는 당연한 말을 묻는다는 듯 먼 곳을 보며 대꾸했다.

“어려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느냐?5)

 

 

아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다.

 

한양 바닥에 소문난 왈패였던, 허궁제비의 밀고로 역관출신의 서책 무역상인 손 직장(直長, 7품 관리)이 천주학쟁이임이 발각되어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자, 장이는 재빨리 책방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최 서쾌에게 알렸다. 몇 년 전 천주학 사건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때처럼 최 서쾌는 또 떠날 준비를 하면서 장이에게 책방에 절대 와서는 안 된다. (기생 집인) 도리원(桃李園)이나 홍 교리 어른 댁에도 절대 걸음을 해선 안 돼.6)라고 다짐을 받는다.

 

하지만 최 서쾌나 홍 교리와의 대화를 통해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된, 장이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먼저 홍 교리 집으로 달려가 위기를 모면하게 한 후, 최 서쾌와 약속한 마포나루로 가서 도망치는 대신 도리원으로 향했다. 누이동생처럼 잘 보살피라는 낙심이의 얼굴이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이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관원들이 도리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도리원이 내려다 보이는 동산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낙심이가 누마루 아래 숨은 것이 보였다. 순간 울컥해진 장이가 낙심이를 구하기 위해 무모하게 담을 넘으려다 실패한다. 늦었지만 사람을 구하려는 장이의 마음에 감동했는지, 도리원의 청지기가 등 뒤에서 장이의 입을 틀어먹고 몸을 붙잡은 것이다.

덕분에 장이는 죽거나 아버지처럼 관아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러한 배려덕분일까? 아버지의 직업이 대체로 아들의 직업이 되던 그 시절에 장이에게 그 아버지와 함께 꿈꾸었던 작은 책방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장이의 맨토 역할을 하던 홍 교리는 감인소(監印所;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담당하던 관청) 필사쟁이 일을 주선하여 인쇄 일을 배울 수 있게 하였고, 아버지 역할을 하던 최 서쾌는 장이 아버지가 맡긴 약 스무 냥으로 책방을 열 배오개의 집을 구입할 것을 암시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결 성숙해진 장이라면 한문 현판인 서유당(書遊堂)’ 대신 언문 현판인 책과 노니는 집을 선사한 홍 교리의 배려에 어울리는 책방을 만드리라 기대한다.



1)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책과 노니는 집>, (문학동네, 2009), p. 11

2)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앞의 책, p. 89

3)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앞의 책, pp. 97~98

4)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앞의 책, p. 139

5)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앞의 책, pp. 153~154

6) 이영서 글 / 김동성 그림, 앞의 책,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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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서유당

    서유당....이책을 읽고 블로그 이름을 지었으니 너무도 뜻깊은 ...

    2013.10.09 13:3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서유당님에게는 정말 인연 깊은 책이겠네요. ^^

      2013.10.09 18:57
    • 파워블로그 서유당

      결정적으로 이름 짓고 나서 블로그란 걸 시작하게 되었으니 의미깊은 책인거죠...

      2013.10.09 21:07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