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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영웅이 되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입장가(入丈家)’로 대표되는 한국식 혼인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과 딸(사위 포함)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재산도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고, 제사도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6세기 후반부터 성리학적 가부장적 윤리가 강화/정착되면서 결혼제도가시집살이로 대표되는 중국식 혼인제도인 친영제(親迎制)로 바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재산상속이나 제사도 장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는 하락하고 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약도 강화되어, 여성이 외출할 때에는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나 장옷 등을 써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여성의 활약을 역설적으로 갈망하는 경향도 발생하였다. 남자만 문무를 겸비하여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되고, 전쟁에서 무용을 뽐내며 승리하는 소위출장입상(出將入相)’이 되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대리충족 시켜준 것이 <이학사전(李學士傳)> 1)이다.

 

주인공 이현경(李賢卿)은 여자로 태어났지만,삼세부터 글 읽기를 힘쓰니 才學이 날로 성취하여 나이 팔구세에 읽어 보지 못한 글이 없고 통하지 않는 글이 없어 문장이 일세에 대두할 이가 없(었다) 2)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평소 여필종부(女必從夫)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잠시의 치기(稚氣)로 착각한 그녀의 아버지는 남복(男服)을 허락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 후, 그녀의 부모가 어린 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녀에게 여자의 도()를 강요할 사람이 없어졌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도 그녀의 재주를 능가할 사람이 없어 쉽게 장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된다. 감찰원 도어사(監察院 都御使)로 승진하자, 국구(國舅; 황제의 장인)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남경왕(南京王) 주환(朱煥)이 반란을 일으키자 출전하여 남경왕의 목을 베고, 이에 동조한 남만(南蠻)마저 평정하고 개선한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녀는 대사마(大司馬)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청주후(靑州侯)에 이른다. 이쯤 되면 과히 여중호걸, 아니 영웅 그 자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이현경의 부친, 죽어서 딸의 앞날을 가로막다.

 

이현경의 부친인 이형도는 이러한 이현경의 행보에 반발한다. 아니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분위기가 죽은 이형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이형도는 그나마 딸과 겨룰 수 있는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기주후(冀州侯) 동료 장연(張淵)의 꿈에 나타나 자기 딸과의 결혼을 권고한다. 이를 이현경이 무시하자 딸의 꿈에 나타나 네 이렇듯 고집하니, 우리가 지하에 있어도 눈을 감지 못하노라. 모름지기 여자의 도를 빨리 행하면 더욱 효도가 되리라. 3)라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하지면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이현경을 보다 못한 그녀의 부모가 결국 일을 낸다. 바로 그녀가 자리에 눕게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어의(御醫)가 그녀를 진맥하면서 여자임이 탄로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천자를 속인 죄를 고백해야 했다. 뜻밖에도 천자(天子)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그녀의 재질에 감탄하며, 대사마(大司馬)와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인수(印綏)는 회수하면서도 청주후(靑州侯)와 문연각(文淵閣) 태학사(太學士) 직위는 유지하게 하였다.

 

이제 여복(女服)을 입게 되었지만, 출장입상(出將入相)하던 이현경의 눈에 차는 사내는 없었다. 심지어 인중호걸(人中豪傑)이라는 장연조차도.

 

이현경에 대한 오랜 우정이 애정으로 바뀐 장연을 안타깝게 여긴 천자가 계교로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들었으나, 시어머니와 장연의 첩 운영(雲暎)의 모해를 받자 그녀는 과감하게 친정으로 돌아간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신뢰가 깨어진 사랑을 다투는 대신 미련 없이 아내의 자리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연이 그녀에게 되돌아올 것을 청하러 갔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며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도리어 이현경이 부리는 사람들로부터 상공이 비록 청주후의 가부시나, 우리 이후는 대원수시요, 상공은 부원수시니 직품을 이를진대, 누가 더하리이꼬. 4)라는 비아냥만 들어야 했다.

 

결국 이현경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한 시아버지의 권고와 장연의 수 차례 애걸을 받아들여 시댁에는 돌아왔으나 여전히 동침을 하지 않다가, 집안의 주도권을 쥔 뒤에 비로소 함께 금침(衾枕)을 베풀고 누었다.

이렇게 이현경은 영웅의 기세는 여전히 유지했지만, 여성의 능력을 억압하는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남장이 탄로나자 이현경은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고 집 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현경의 후예, 그녀의 낯을 볼 수 있을까?

 

현재 대한한국의 여성들은행동거지나 말씨, 의복 등에 대한 규제가 전통 사회에서보다 훨씬 약화되었으며, 교육이나 취업 등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기회도 크게 증가5)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 스스로 과거의 관념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우에는 가정 외의 직업을 가진다는 것이 그들이 전통적으로 맡아 온 가정 역할을 대체하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정 역할의 의무가 완수된 이후에 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가정 생활 내지 가족 관계의 민주화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이중 부담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6)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바람에호부상서(戶部尙書) 겸 기주후(冀州侯) 장연의 부인이 아닌대명(大明) 문연각(文淵閣) 태학사(太學士) 겸 청주후(靑州侯) 이현경으로 남기를 원했던 이현경과는 달리 아직도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독작적인 경력(career)의 축적보다는시집 잘 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 획득의 유일한 수단7)으로 남게 된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성이 전문가 대우를 받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인정받더라도 결혼이냐 직장생활이냐라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의 관문을 지나야 하고, 운 좋게 주변에서 양해하더라도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을 모두 뛰어나게 잘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학사전>의 주인공 이현경보다 더 발버둥쳤다고 할 수 있을까?



1) <이상서전(李相書傳)>, <이현경전(李賢卿傳)>, <이형경전(李馨慶傳)>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 김기동/전규태 편, <금오신화, 이학사전, 허생전>, (서문당, 1984), P. 115

3) 김기동/전규태 편, 앞의 책, p. 139

4) 김기동/전규태 편, 앞의 책, p. 193

5) 문옥표, 가족 내 여성지위의 변화 유교전통을 중심으로 –“, <정신문화연구> 19 2(1996), p. 60

6) 문옥표, 앞의 글, p. 69

7) 문옥표, 앞의 글,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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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금비

    남장여성 소재를 쓴 소설이라니. 작자미성인가요?조선시대 문학작품인지요. 그시절 이런얘기 신기하기도하고요. / 예스에 없는 책 !^^

    2014.02.09 08:0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1. 작자 미상/창작 연대 미상이지만 조선시대 작품입니다.
      2. 그 시절에 여성끼리 혼인을 한다는 <방한림전> 같은 작품도 나왔다고 합니다.
      3. 1994년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지 yes에서는 검색되지 않더군요.^^;;
      p.s. 왜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네 서점에서 낱 권으로 파는 저 시리즈를 보고 몇 권 구입했었는데, 이제는 교보문고 등 몇몇 서점에서만 검색이 되네요.

      2014.02.10 19:18
  • 파워블로그 껌정드레스

    <이학사전>, 흥미롭습니다. <홍계월전>만 알고 있었거든요.

    2014.02.09 09:4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1. 저는 1994년판 서문당 한국고전문학 100(32권 세트)에서 몇 권 구입한 것 가운데 <토끼전/장끼전/김진옥전/홍계월전>(8권)과 <금오신화/이학사전/허생전>(17권)이 있어서 알게 된 것이랍니다.
      2. 리뷰를 쓰면서 검색해보니, <이학사전>과 비슷한 플룻을 가진 고전으로 <정수정(鄭秀貞)전>도 있네요.

      2014.02.10 19:38
  • 새벽2시커피

    waterelf님 리뷰만으로도 이야기가 재밌고 흥미로운 반면 분통 터지네요ㅎㅎㅎㅎ

    2014.02.09 15:4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waterelf

      1. 누구의 아내 *** 보다 @@@ 직책의 ***를 원했던 이현경이었기에 죽은 아버지가 귀신의 상태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좀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2. 또한 남장을 해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녀차별이라는 시대의 한계를 들어낸 것으로도 보입니다.

      2014.02.10 19:52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