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굴레라는 천형(天刑)
신분의 굴레라는 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종의 천형(天刑)이다. 그렇기에 아주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인재들이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조국가(王朝國家)에서 왕족(王族)은 일종의 예비 찬탈자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국가에서 양반(兩班)이 하나의 지배계층, 아니 신분으로 정착해가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얼(庶孼)이라는 존재를 하위계층으로 만들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철저히 제한을 가해 자신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왕족(王族)이라는 신분도, 서자(庶子)라는 신분도 모두 제한 받는 삶을 살게 만드는 하나의 족쇄인 셈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덕무(李德懋)는 이 두 가지 족쇄를 모두 차고 태어났다. 게다가 이러한 족쇄로 인해 가난을 대물림 하면서 얻은 기침병마저 달고 다녀야 했다. 그 결과 이덕무(李德懋)는 오랫동안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서(漢書)>를 이불 삼고 <논어(論語)>를 병풍 삼아, 삶을 모질게 이어가야만 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 책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책이었다. 예닐곱 살 무렵부터 벽에 금을 그어 책 읽는 시간을 지켰던 이덕무(李德懋)는 스무 살 무렵에는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가며),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1) 그의 간서치(看書痴)라는 별명도 이런 그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어쩌면 간서치(看書痴)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던 그의 삶은 좋은 벗과 훌륭한 스승을 맞아 변화하였다. 오랜 세월 친척집으로 셋집으로 정처 없이 떠돌다가 20대가 꺾이는 1766년, 청년 이덕무(李德懋)가 처음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이 백탑(白塔)이라고 불리는 원각사 십층석탑(圓覺寺十層石塔)이 있는 대사동(大寺洞, 지금의 仁寺洞)였는데, 다행히도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벗이 된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백동수(白東修), 이서구(李書九)와 같은 친구를 얻었고,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같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의 벗 가운데 그의 평생지기이면서도 대조적인 사람이 박제가(朴齊家)이다. 그는 다른 서자(庶子)들과 달리 당대에 서자(庶子)가 되었기에 <홍길동전>의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였을까 이덕무(李德懋)의 벗 가운데 “박제가(朴齊家)의 성격이 가장 강파르고, 깎아지른 절벽처럼 위태로웠다.”2)
정조(正祖)가 송(宋)나라의 젊은 개혁가였던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었던 것처럼, 박제가(朴齊家)는 낡고 잘못된 것을 물리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였던 급진적 개혁주의자였다. 반면 이덕무(李德懋)는 실학파(實學派), 그 중에서도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뚜렷한 개혁안을 제시한 적이 없다. 겨우 그가 시도한 것은 박제가(朴齊家)처럼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사회의 가치체제에 대한 의문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심한 모범생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 또한 그 나름대로의 처세술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후대의 역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소개글에서 빠지지 않는, 박학다식(博學多識)에 바탕을 둔 꼼꼼한 고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조선 르네상스, 좌절된 개혁의 꿈
어쨌든 백탑파(白塔派)로도 불렸던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벗들은 이름난 사대부 집안의 자손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자(庶子)출신이었기에, 여느 선비들처럼 유교 경전을 익혀 벼슬에 나아갈 수도 없었고, 땀 흘려 일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몸소 뼈저리게 느껴야 했지만, 그들은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면서 평생을 보내기 보다는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대안까지 제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러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가진 그들의 학문을 훗날 “실학(實學)” 혹은 “조선학(朝鮮學)”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의 사는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젊은 그들의 새로운 학문은 비롯되었으니까요. 그들 역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 보았고, 날 때부터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껴왔기에, 그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개혁을 원했는지 모릅니다. 이들을 알고부터 나는 실학이란 말을 대할 때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3)라는 저자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벗들이 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 <간서치전(看書痴傳)>이라는 짤막한 자서전까지 저술하였지만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벗들은 결코 책 속에만 머무르는 책상 돌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후기 민중의 삶을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의 애환을 느끼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위대한 선각자였습니다.
정조(正祖)가 재위했던 그 짧은 “조선 르네상스”4)는 조선(朝鮮)이라는 사회가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가던 시기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 왕조 최후의 몸부림 뒤에는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벗들의 노고(勞苦)가 적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비극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벗들의 노력은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워서 알듯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양반과 서자(庶子)라는 신분의 차이도, 가진 것의 차이도, 나이의 차이도 뛰어넘었던 그들도 기득권의 굳건한 벽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