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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안한가

[도서] 나는 왜 불안한가

주응식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세 평 진료실에서 철학 숲과 미술 정원을 산책하다 

 

 

철학이나 미학에 관해서라면 어려울것 같다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철학자의 이론을 읽을때마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안겨주고, 다소 생경한 학문적 용어나 이름에 거리를 두고 싶기 마련이다. 

<나는 왜 불안한가> 이 책에서는 이러한 막연한 불편함이 없었다. 분명 미술을 보면서 철학을 언급하는데,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깊이와 도움을 준다. 이런 식의 미술읽기와 혹은 철학읽기를 공부해 나간다면 분명 눈에 띄는 성취가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때로 저자가 임상에서 만났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거론하거나 예를 들어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부분들도 무척 흥미로웠다. 탁상공론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있는 적용을 목격하는 순간인 것처럼. 

 


 

미술과 철학을 연결해 보고 싶어서 열 명의 미술가와 세명의 철학자를 소환했다고 소개하는 책. 우리의 삶과 미술, 그리고 우리의 삶과 철학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문체로 풀어보고 싶었다는 저자의 겸손한 의도에 눈길이 먼저 갔다. 

그래서 이 책에서 돋보이는 업적을 꼽자면, 저자가 추구한 의도처럼 어렵거나 관념적이지 않으면서 깊이와 재미의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산부인과 전문의로 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단지 미술과 철학에 대한 공부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소개를 보니 그저 또 한 번 그의 학문적 소양에 놀라고 만다. 

 


 

 

 

아르놀트 뵈클린 (1827-1901)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실존에 대한 세 가지 물음 중 '죽음'에 관해 진지하게 묻는 화가가 있다. 뵈클린은 '죽음의 화가'로 불렸을 만큼 죽음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19세기말 유행했던 상징주의는 어두운 현실을 현실에서의 이탈이나 관념으로의 회귀로 회복해보려는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상징주의의 주제는 주로 죽음, 환각, 판타지, 에로티시즘이다. 

철학자들 중에서 죽음이라는 주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이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일 것이다.  

그는 실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결정해서 선택하고, '존재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존재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대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삶을 살기보다는 타인에 의해 정해진 '존재 가능'에 맞추어 살아가게 되고 그런 세계속에서 안주하며 안락함을 느낀다. 그러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해야만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찾을 수 있고 '본래적인 삶'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과 같이 죽음의 그림자는 보기 힘든 긍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우울증 환자나 자살자가 오히려 넘쳐나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이런 현상은 인간은 깊은 내면으로 내려가는 기회를 박탈당해 긍정의 피로에 지쳐 우을감이 찾아 오는 것이라 진단하고 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병이 필요한 것이듯, 인간에게 긍정성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부정성이고, 이 둘의 존재는 인간의 삶의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

 

인문학과 철학을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욕망의 방향을 바람직한 곳으로 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p32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존재의 허무를 채워주는 시간, 시간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

고흐는 우울과 망상에 시달렸던 시기에 왕성한 창작력으로 약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고흐에게 우울과 광기는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의 고통의 산물을 보고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만 들여다 본다면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회의론적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개념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시간 앞에서 영원하거나 불변할 수 없다. 죽음. 바로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우울에 빠진 이들은 내부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시간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성을 거세 당한 듯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그저 시간이 중단되길 원한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하이데거의 불안, 존재의 진리로 통하는 비상구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 불안, 사랑, 공포, 슬픔 등의 강렬한 감정을 그 누구보다 밀도있고 극적이며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임상에서 만난 환자의 이제껏 살아온 삶이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억누르고 타인의 욕망에 의해 살아 왔다고 후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거지?'와 같은 물음을 하이데거에게는 '불안'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불안을 통해 '세상에 묶여 느긋하지만,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나'와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고유한 나'를 발견하는 '현존재(인간)의 구조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상적인 인간은 '퇴락'적 삶을 살고 있건만, '불안'은 일상적 삶에서 '본래적' 자기를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불안'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왜 살고 있는거지?'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이 나의 존재에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p63

 

저자는 환자인 그녀에게 자신과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을 권하였다. 스스로의 내면을 자주 들여다보고 자신의 허무나 욕망과도 가깝게 지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편한 나의 내면의 허무와 욕망을 마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안은 온전한 나의 내면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는 때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뭉크의 자화상의 시선이 보여주는 가르침도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을 느낄때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지점이 새로운 사유가 생겨나는 출발점이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불안마저 우리의 존재 방식 중의 하나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사랑해주는 자세.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봐야할 방법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

라캉의 상상계에 빠져버린 현대인

나르키소스를 그린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 카라바조의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이다.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는 인간의 자아와 주체를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큰 두 축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먼저 상상적인 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더 자라면서 법, 질서, 규범등을 총칭하는 상징적인 것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주체를 형성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이 성장하여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적절한 진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나르키소스는 상상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어버린 존재이다. 자기에는 우리에게 자좀감을 부여해주는 토대이지만, 지나친 자기애와 이미지들에 도취된다면 정신의 성장을 방해할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상상계보다는 상징계적 질서를 더 중요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에른스트 키르히너(1880-1938)

철학이 주는 위안, 예술이 주는 해방

키르히너는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활동했던 표현주의 화가이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브리케(다리파)라는 그룹을 결성하는데 그들은 대상의 형태를 단순하게 변형시키고 원초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대상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고통을 그리고자 했다. 

'다리파'라는 이름은 니체의 '위대한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버멘쉬와 짐승을 잇는 다리같은 존재이다'라는 글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전통과 미래를 이어 진보한 예술을 창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가 키르히너의 그림을 보고 위안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의 그림은 뜨거운 초기의 그림이든, 차가운 후기의 그림이든 불안한 우리를 그 불안에서 해방시킨다.p115 


 

 

 

구스타프 클림트(1862- 1918)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거짓말쟁이, 이성은 고작 거짓말쟁이의 하수인인가?

1900년 전후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그의 무의식의 이론에 의해 문화 음악, 미술등이 급격하고도 혁명적인 전화점을 이루었다. 클림트 역시 프로이트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의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욕망이나 충동의 저장소 같은 곳이며,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서 의식을 조종하는데 무의식이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고 했다. 프로이트 이후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인간의식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의식의 실체에 관해 연구했다고 한다. 

당대의 질서와 규범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의 언어로 예술세계를 창조한 클림트는 작품 안에서 욕망과 충동, 성과 죽음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앙리 루소(1844-1910)

니체의 병듦과 회복의 내적 변증법, 위버멘쉬를 위하여

4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고군분투하여 전업화가가 된 앙리 루소는 이국적이고 낯선 화풍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존 철학의 체계를 전복시키고, 인간을 신으로부터, 또 인간이 섬기는 다른 모든 주인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이성과 합리에서 벗어나게 하고고, 생의 원시성을 과학과 이성에서 탈출시키려했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한 이, 자유정신의 소유자로 제시하는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묵묵히 하거나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이해하고 따르는 이들일 것이다.  

니체에게 두통마저 병듦과 회복을 반복함으로써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일종의 통과의례였고, 몰락은 인간이 더 나은 상태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다

 

실존주의라 부르는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만을 따르는 삶을 경계한다는 점에 있다. 하이데거의 '세계', 라캉의 '상징계', 니체의 권력 혹은 무리들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 개인의 외부적인 곳에 존재하며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구조들인데, 모두 그 구조에 비판없이 편입되는 삶을 비판한다.p159

철학과 예술은 그렇게 삶의 근본을 어루만지며 생의 상처 역시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도려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병듦과 회복, 고통과 치유, 니체의 사유 안에서 철학과 예술은 하나처럼 보였다. p179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니체여!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이즘의, 자본의 신을 죽일 수 있을까?

쿠르베는 역사의 영웅들이나 신화나 성서의 내용르 그리지 않고,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을 그렸던 사실주의의 대표 화가이다.

니체가 권위와 복종의 신을 인간의 사유에서 지웠다면 쿠르베는 신과 그 대리자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캔버스에서 지웠다. 니체가 삶의 단독자로서의 인간을 실존으로 내세웠다면 크르베는 모든 인간의 순간순간을 화면의 중앙에 내세웠다. p193

 

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니체가 볼 때, 현대인들은 또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즘의 신'과 '자본의 신'. 현대인에게 돈은 우리가 모시는 최고의 신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스스로 인간의 격과 위엄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신의 행세를 하며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것은 진정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말한다. 


 

 

 

폴 고갱(1848-1903)

영원회귀라는 화두가 주는 무게

후기 인상파의 대표 화가인 고갱의 유명한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존재 근원의 질문을 던지듯이 깊고 묵직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림 자체가 철학적인 물음을 가득 던지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고갱은 내면의 강인함으로 현실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순수성과 원시성을 작품에 그려넣으며 예술가로서의 힘을 되찾았다.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태도나 자세일지도 모른다.삶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위치에서 다른 시선으로 그것을 마주할 때 변화하고 회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존 싱어 사전트(1856-1925)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의 비유는 단순한 동화적 설정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존재의 가장 높은 곳에 둔 철학자가 니체이다. 위버멘쉬를 설명하며 인간 정신의 3가지 단계의 변화를 낙타,사자,어린이로 비유한다. 

낙타는 주인의 도덕과 가치를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단계, 사자는 도덕과 가치를 행하는 규범을 스스로 선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단계, 어린아이는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삶을 이끌어 나가는 존재이다. 

 

사전트가 그린 천진난만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에서 니체의 비유를 떠오르는 것도 그럴만하다.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 중 우리 내면에서 어떤 존재를 깨워낼 것인가는 우리 선택의 몫이다. 규칙을 지키는자, 규칙을 만드는자, 규칙에 초연한 자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길러낼 것일까.


 

 

 

인문학과 철학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는 요즘이다. 마치 유행이나 트렌드처럼 곳곳에서 관련된 서적들이나 관심들이 보인다. 왜 이제와서 또 인문학이고 철학일까? 아마도 시대가 요구하기 때문일 테지만, 근본적인 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불안하고 아프다.

살아가면서 고통이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그곳에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육체적이거나 혹은 감정적이거나 이 아픔은 치유되어야 한다. 미술과 철학을 통해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림을 보면서 사유하는 놀이처럼 이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겐 그랬다. 그리고 이것이 미술을 알고 보는, 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도 한 가지 생각이 인다. 나도 그저 해야만 하는 것을 줄이고 하고 싶은 것을 늘려보는 것에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 하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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