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여 우리는 귀족의 행태를 비난합니다. 그 당시 귀족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층민을 아예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그들을 ‘당연히’ 비난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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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는 말처럼 당연하지 않은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우리가 당연하다는 말을 할 때 그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규범, 기술의 발전, 외부 환경(물론 자연환경까지 포함해서) 처럼 우리를 둘러싼 유무형의 존재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1775년 프랑스에 살고 있었던 귀족들의 행태를 비난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당연히 여겼던 귀족과 하층민의 구분은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답을 달면서도 지금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이 몇 십 년 후, 아니 몇 년 후에는 당연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의 사고를 날카로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것으로 강요되어져 왔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논의의 중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2. 찰스 다네이이자 시몽 에브레몽드는 자신의 귀족이라는 지위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윗대에서 했던 악마적인 행위로 인해 죽음을 대가로 치뤄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죠. 그의 엄마는 아이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게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그리고 그 윗대의 일들을 속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는 한 번은 타당한 이유로 살아남았지만, 마담 드파르주의 복수로 인해 결국 사형을 선고 받게 되지요. 그런 그의 운명은 인과응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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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질문을 읽었을 때 ‘연좌제라니, 안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만큼 책에 몰입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찰스 다네이와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그때 그는 그저 어린아이였고 게다가 그런 환경이 싫어 절연하고 국적까지 버렸는데 말이다. 거기에 이야기의 결말로 갈수록 그 등장만으로도 긴장감을 주던 마담 드파르주도 나의 이런 생각에 한 몫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마담 드파르주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가 쓰여졌다면, 그녀가 가족을 잃고 이제껏 살아온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찰스 다네이가 억울하다는 것과 마담 드파르주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혈연을 떠나 개인은 오롯이 그 자신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 역시 여전하다. 하지만 적어도 마담 드파르주에 대한 입장은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가지 떠오른 것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 청산문제이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찰스 다네이와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 청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과연 우리가 이야기하는 과거 청산에 대한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3. 그들(파리의 시민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런 사상이 아닌 기요틴인 듯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피가 섞이고, 내일의 피까지 준비되어 있다는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시피 매일같이 그들은 희생물이 필요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일까요?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적인 ‘살인’은 응당 치뤄야만 하는 대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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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혁명이 ‘기요틴’으로 대변되는 시점에서 이미 그들의 혁명정신은 그 방향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간 억눌렸던 귀족들에 대한 분노와 그들을 몰아냈다는 희열은 그들을 더욱 열성적이고, 심지어 과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역시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무언가 집단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 무리에서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이 지속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