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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 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pp.346-347


내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아침을 시작하는 거리만큼,
만날 날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말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년에는 꼭 가겠다며, 시간을 고르고 일정을 어찌 빼야할까 고민을 하며
신과의 반가운 만남을 하루, 하루 고대하던 날들이었다.

나는 당신이 내 곁에 계속 있으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어느 새벽 날아든 당신의 부재에, 다음을 약속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시간이 지난 후, 당신이 떠나기 전 내게 남긴 글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아이처럼 엉엉 울었는지 당신은 모른다.

"우리는 네가 너무 그리워. 휴가를 내서 이곳에 들러줘"


시 한편이 마음에 박혀 한참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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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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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추억책방

    좋은 시네요. 몇 번을 다시 읽었어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읽으니 더 감흥이 옵니다.
    Joy님. 남은 한주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2020.10.07 09:54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Joy

      네, 이 시를 읽으며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미루고 있던 만남들이 떠올라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기도 했구요.
      추억책방님, 내일이 지나면 다시 빨간날이네요. 조금만 더 힘내보아요!

      2020.10.07 21:32
  • 스타블로거 크리스탈호이

    주변의 어떤 말 보다도 책 속 한줄이 더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지요. 특히 시는 짧은 글이지만 감정은 더 강하게 와 닿아,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듯이 마음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무엇이라도 위로의 말을 써보고 싶지만 그 어떤 말도 Joy님께 가 닿지 못할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조금씩 흐릿해지면 좀 괜찮아지실까요..

    2020.10.07 15:05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Joy

      크리스탈호이님 감사합니다.
      친구를 떠나보낸지는 이제 2년 남짓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떠올리기만 해도 울음이 나왔는데, 이제는 좋았던 기억, 고마었던 순간도 함께 떠오릅니다. 이 시를 읽으니, 친구와 미뤄두었던 약속이 다시 생각나 마음이 아팠어요.

      2020.10.07 21:35
  • 파워블로그 하루

    Joy님 덕분에 시를 즐겨읽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2020.10.07 18:35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Joy

      가을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요즘 '시'와 관련된 도서를 연이어 읽고 있습니다. 함께 읽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10.07 21:36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