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유럽여행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한정적인 휴가일수(솔직히 1년치 휴가를 다 끌어쓰면 제법 시간을 챙길 수 있지만, 그런 선례를 만들기에 나는 너무나 소심한 사람이다)에 오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제대로 머물며 여행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거기에 들인 돈을 생각하면 소위 본전 생각에 선뜻 지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여행이 남는 것‘이라며, 나에게 주는 가장 큰 호사라 생각하고, 눈 딱 감고 지르기도 하지만 올해는 예상도 못했던 코로나19 상황에 유럽은커녕 우리나라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도 녹록치 않다.
그래서일까? 역설적이게도 올해 유난히 여행관련 서적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내가 지금 갈 수 없으니 방구석 여행이라도 하자는 마음일게다.
파리, 빈, 프라하, 런던, 베를린, 라이프치히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유럽의 여섯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영화를, 그 곳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을, 그리고 잊지 못한 역사적 사건들을 빌어 저자는 그곳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저자가 언급한 영화들(미드나잇 인 파리 : 파리, 비포 선라이즈 : 빈, 미션 임파서블 : 프라하, 노팅 힐 : 런던, 베를린 천사의 시 : 베를린, 이외에도 퐁네프의 연인들, 아멜리에 등도 만날 수 있다)을 만나니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라 더욱 흥미로웠다.
유럽 여행을 어떻게 해야 기억에 남을까. 어떻게 여행해야 내 인생을 살찌울까. 안단테(andante) 여행이다. 속도를 늦추면 사람이 보인다. 대자연을 호흡하는 여행과 함께 사람을 만나는 여행만이 오래도록 향기가 지속된다. p.7
게다가 느린 걸음으로 도시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여행법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할 때면 한 곳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곤 한다. 특히나 유럽처럼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앞서도 그랬듯이 소위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처음 유럽을 갔을 때 나의 여행도 그러했다. 그렇다고 그때 나의 여행들이 잘못되었다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며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큰 원동력이 되어줬다(애초에 여행방법에 ’정답‘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생각한다. 그저 내게 맞는 여행법이 있을 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조금 느린 호흡으로 도시를 만나려 하고 있다. 시골장터에서 과일을 사 우물거리며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빌려 도시를 둘러보기도 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위의 도시들 중 라이프치히를 제외한 다섯 도시를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그중 나를 가장 매혹시켰던 도시는 프라하였다. 몇 해가 지났지만 프라하의 밤, 카를교를 걷던 그 설레임을, 패들보트(오리보트?)를 타며 바라보던 그 파랗던 하늘을, 낯선 여행자로 만나 함께 도시를 헤매고 다녔던 그리운 얼굴들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저자의 글은 어느덧 나를 그 시간, 그 곳으로 훌쩍 데려다 놓았다.
프라하성은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아청빛 하늘에 프라하성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다. p.178
결론부터 말하면, 프라하 구시가광장은 나의 해외여행 경험에 비추어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다. 어떻게 손바닥만 한 공간에 이렇게 기막힌 이야기들이 숨어 있고, 이렇게 개성 있고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모여 있으며,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거쳐 갈 수 있는지! 파고들면 들수록 경이롭기만 하다. p.183
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삐뚤빼뚤 얽히고설켜 있는 데다, 자칫 가게가 예쁘다고 한눈을 팔다가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길에 보석 같은 가게들이 숨은 그리머럼 박혀 있어 정신을 홀리기 딱이다. 하긴, 까마득한 중세에 조성된 거리를 21세기 사람이 걸으면서 길을 잃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pp.191-192
구시가 골목길에서는 중세의 일상이 그랬던 것처럼 시곗바늘이 라르고의 속도로 간다. 도무지 급할 게 없다.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에서처럼 알레그로로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프라하 구시가의 매력이다. p.192
나에게 시간여행을 선사해준 프라하 외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유럽의 ’묘지 투어‘였다.
왜 유럽 사회에는 묘지 투어가 깊게 뿌리를 내렸을까. 앞서간 이의 생애를 통해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각하는 자만이 참된 삶을 깨닫게 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묘지 투어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을 동시에 가르치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공유한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묘비명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낸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에 애틋해졌던 기억이 있다. 죽음을 자각함으로 삶의 중요함과 감사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에 공감이 간다.
책에는 멋진 사진들도 실려있었는데, 책 읽기에 집중하느라 그랬는지 한 장도 찍어두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글을 쓰면서야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기억 속 그 시간들을 재생하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유럽을 여행할지, 그 누구도 확신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내년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욱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유럽을 기대하며 다시 그 곳에서 마주할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나에게 적용하기
코로나19 상황 이후 여행하고 싶은 곳 적어보기(적용기한 : 12월)
*기억에 남는 문장
식도락, 예술 작품 감상, 건축물 답사...... 저마다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여행 코드가 나올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천재’라는 코드로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를 돌아다녔다. p.5
“죽일 수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게 권력이 아니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게 진짜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p.76
*쉰들러 리스트 중에서
튀르크 군대는 철군을 하며 신속한 후퇴에 방해가 되는 보급품을 버리고 간다. 이때 남기고 간 보금품 중에 까만 알갱이 포대가 있었다. 빈 시민들은 이 낯선 알갱이가 신기했다. 먹어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커피 원두였다. p.137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린츠 태생이고 빈에서 10대를 보냈지만, 세계인은 모두 그를 독일 사람으로 알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애써 이 팩트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 p.140
아인슈페너는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라는 의미다..(중략)..마부도 사람이다. 그 역시 커피다 당길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 손님의 호출이 있을지 모른다. 커피를 마시다 손님이 부르면 마시던 커피를 어떻게 하나? 길바닥에 쏟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고민 끝에 커피 위에 휘핑크림을 얹었다. 커피가 마차의 흔들림에 쏟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중략)..어쨌든 어떤 커피 선각자가 아인슈페너를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비엔나커피’라고 이름 붙였다. 해외여행을 꿈도 못 꾸던 시절, 사람들은 서울 명동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빈을 꿈꿨다. pp.146-147
이 세상에서 바탕 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