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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도서] 여름의 빌라

백수린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친구가 2020년에 읽은 책 중 최고라며 선물해 준 책.

소중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서 마음에 물기가 차올라서 한 번에 길게 읽는 것이 힘들었다.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읽다 보면 빠져들고 슬퍼졌다.

 

모든 내용이 재밌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 <흑설탕 캔디>였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들여다본 그녀의 삶은 그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고독에 숨이 막혔고 외로움에 갇혔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늘어진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 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버티다,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시선을 빼앗긴다.

피아노를 치던 감각과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녀는 용기 내 피아노를 치게 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한다.

그렇게 브뤼니에 씨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말이 통하지 않아 한불사전으로만 대화할 수 있는 두 사람은 그럼에도 음악을 통해 시간을 함께하고 기억을 나눈다.

또다시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스스로를 바보같이 여기며 상념에 빠진 그녀는 브뤼니에 씨가 천진하게 쌓아올린 각설탕 탑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그녀도 각설탕을 하나 더 쌓는다. 부질없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긴다.

그리고 나의 꿈에 나타난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

손녀인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주지 않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것이란다."

 

그녀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은 난생처음 먹어본 황홀하리만큼 달콤한 흑설탕 캔디일 것이고, 자기 몫의 행복이다.

<흑설탕 캔디> 속 할머니는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희생의 아이콘이 아니다.

몸은 퇴화했을지라도 마음만은 여전히 뜨겁고 갈망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강요받는 평범함 대신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이야기의 한 부분 같던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서야 정말 완성된 「여름의 빌라」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길,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랑의 세계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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