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하는 대학로 나들이였습니다. 종일 꾸물거리던 날씨는 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몰아치는 비바람에 쫓겨 극장까지 올라갔지만, 티켓을 받으러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와야 했습니다. 개략적 분위기만 듣고 극장을 찾은 것이었는데, 온통 젊은 친구들이 그것도 쌍쌍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서 조금은 위축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도 결혼식장에서 만난 신랑이 버린 여자와 신부가 버린 남자가 티격태격 끝에 원나잇 스탠드를 가지게 되는데...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될까요?
2인극으로 더블 캐스팅하고 있는 <극적인 하룻밤>의 5월 2일 오후 5시 공연은 여주인공 시후역에 채송화씨, 그리고 남주인공 정훈역에는 김정호씨였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두 명의 배우가 100분이 넘게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연기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은 터인데도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습니다.
극단에서 내놓은 두 사람의 속마음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식장에서는 시후가 정훈에게 막무가내로 대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여자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오면 대부분의 남자는 꼬리를 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결정적 카드를 내놓는데... 정말 연애하는 남자에 관한 모든 것을 여자 후배에게 시시콜콜 알려주는 여친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시후’S Diary
전세금까지 빼서 뒷바라지한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 결혼식장 뷔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초밥마저 먹을 수 없는 운이 더럽게 없던 날. 나를 따뜻하게 사랑해줄 것 같은 남자를 만났다. 두근두근. 사랑하고 싶지만 내가 또 상처받을까 두렵다.
정훈’S Diary
연애도 모르던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준 전 여자 친구의 결혼식. 축하한다 한마디 해줄 용기도 없으면서 무작정 찾아가 자존심만 구긴 날. 사랑은 그만하고 싶었는데 왠지 마음이 쓰이는 여자를 만났다. 내가 다시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던 내 마음이 차가워지던 게 무섭다.
정훈은 원나잇 스탠드로 끝내고 싶은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시후는 끌리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두 배우가 잘 살려내더라는 것입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정훈 역을 맡은 배우 김정호씨가 고음이 약한 듯했던 점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배신당하는 바람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음정이 불안해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반면에 사랑에 배신당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시후가 지나치게 침착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정작 궁금했던 것은 두 사람은 왜 결혼식장에 갔던 것일까요? 나를 차버린 여자, 전세금까지 떼어먹고 아이까지 지우게 한 다음에 나를 차버린 남자의 결혼식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결혼을 엎으려고 간 것이면 속 시원하게 한 판을 벌이던가....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커플로부터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서로 잘 아는 상황에서 원나잇 스탠드를 넘어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요즈음 젊은이들은 그럴 수 있나요? 정말 헷갈리는 연극이었습니다만, 젊은 관객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쿨한 표정으로 극장을 빠져 나오더라구요...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연극은 지루하거나 생각할 틈을 주지 않은 탓인지 막상 커튼콜이 끝나고 무대가 텅비었는데도 무언가 잡히는 느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젊은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