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궁핍함에 도가 있다면 이중섭에게 피난 생활은 도를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친 것이었다. 제주도에 와서도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은 주인집에서 보리밥을 한 웅큼 얻어 끼니를 해결했고, 양파 밭에서 날품을 팔고, 밭에 버려진 야채나 보리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마저도 없으면 중섭은 아들을 업고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았다. 아내의 위장 질환이 가볍지 않았으나 변변한 약을 쓸 돈도 없어 조개껍데기를 빻은 가루를 먹는 방편으포 궁색하게 치료의 구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중섭의 형 중석의 가족들 중 유일하게 중섭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 조카 영진은 부산에서 중섭과 헤어진 후 서귀포에서 오랜만에 그들과 해후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서귀포에서 내가 숙모를 처음 뵈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숙모는 일본에서 건너올 때 입고 온 짙은 곤색 바지와 곤색 블라우스를 그때까지 입었습니다. 그것이 해질 대로 해져서 누가 보아도 거리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숙모의 팔을 붙들고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숙모님! 숙모님! 제가 꼭 옷 한 벌 해드릴게요!"
아내와 자식들을 보내고, 그날 밤 이중섭은 고향 후배인 김인호와 술을 마신다. 참고로 이중섭은 자신보다 어린 동생에게도 곧잘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인호 형, 나는 남덕이를 버린 죄인이야. 남덕이를 보내다니. 남덕이는 이쁜데."
"나는 죄인이야. 세상을 속인 죄인이야. 나 같은 것을 누가 용서하겠어. 인호 형 안 그래."
"피난! 흑측, 헤헤, 피난! 한이 너무 많아!"
원산에서 모친과 헤어진 데 이어 부산에서 처자식과 생이별을 한 중섭은 그때부터 며칠이 멀다하고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편지를 부친다.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라. 앞부분에 이중섭이 당시에 쓴 편지의 제목을 옮긴 것과 같이 애정과 그리움이 넘치는 내용으로 편지를 가득 채운 이중섭은 편지지에 그림으르 그려 넣기고 하고 직접 그린 은지화를 동봉하기도 했다. 은지화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가난했다. 가난해서 은지화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수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술혼을 불태워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아내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반드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부가 떼로는 너무 지나쳤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다 버거운 요구였다. 남덕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