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이중섭은 분노와 증오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주도 피난민 시절, 함께 술을 마시던 이가 취해 "이 피난민 새끼"라고 욕을 퍼부어도 그저 소주잔을 따뜻하게 응시하다가 "헤에"하고 웃고 마는사람이 이중섭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의 천진함은 오히려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먼 친척 뻘 되는 위상학은 촌수와는 상관 없이 이중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 또한 화가였으나 이중섭과는 달리 미군부대 내에서 초상화를 그려 큰 돈을 벌었다. 중섭이 서울에 기저할 때 하루는 위상학이 자신의 저택에 이중섭을 데리고 와 밤새 술을 마셨는데, 중섭의 빈천한 삶이 아무래도 그를 자극했던 것 같다. 큰 돈을 모으긴 했으나 예술가로서의 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던 위상학은 이중섭과의 술자리가 있은 지 한참이 지난 후이긴 하나 결국 자살하고 만다.
중섭의 간염은 그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그해 여름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다시 입원하다. 그리고 9월 6일, 이중섭은 병실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눈을 감고도 3일이 지난 후, 친구 김이석이 이중섭을 찾아왔다가 알게 되면서였다. 병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남긴 것은 밀린 병원비 18만 원, 병원비를 반으로 깎아 장례식장에서 모금한 9만 원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이중섭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밑바닥을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고 똑바로 다시 서기에는 여리고 약했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런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어린아이같이 친절하고 어린아이같이 철없고 어린아이같이 어리숙한 모습이 이중섭을 이중섭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이중섭의 찌질함은 화가 이중섭의 예술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흔히들 예술은 삶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중섭은 스스로의 찌질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수영의 찌질함은 이중섭의 찌질함과 다르다. 김수영의 삶은 이중섭의 삶과 다르다. 그리고 심수영의 예술은 이중섭의 예술과 다르다. 때문에 누구의 삶이나 예술이 더 나은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여전히 내 발목을 스스로 걸어 넘기는 나의 찌질함을 마주하면서 생각해본다. 김수영은 나에게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럼에도 바라볼 수 있는 저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차르쳐주었다.